<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 저
나는 누구의 시선으로 살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에서
나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참 중요한 사람이었다. 어딜 가든 튀는 것도 싫어하고, 무언가 선택할 때도 내 마음에 드는 것보다는 남들이 좋다는 쪽을 선택하곤 했다. 그러다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20대 초반쯤이었다.
학창 시절에는 다들 공부를 하니까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당시에는 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oo 대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만 보며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삶을 살았다. 어리석게도 대학만 가면 모든 인생이 끝나고(?) 창창 대로가 펼쳐질 줄만 알았다. 라떼는(^^) 많은 어른들이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시곤 했는데, 요즘도 그런 말이 통용되는지 궁금하다. 순진한 청소년에게 이 말은 정말 위험한 말이었다.
운이 좋게도 공부한 만큼 성적은 따라와 줬다.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웬걸. 더 많은 공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했었지, 대학교에 가서 무엇을 배우고 싶다거나,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등은 부끄럽게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변명하자면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알게 된 것이 있다면, 행복해질 언젠가를 기대하며 현재의 고통을 참고 산다고 해서 행복한 '그 언젠가'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지금 괴로워도 졸업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해질 거라 믿으며 참고 살아왔는데, 그 모든 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 20년을 살아온 태도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항상 그래 왔듯 남들에게 뒤처지면 안 되니까, 일단 주변 사람들이 사는 대로 비슷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20대 후반 즈음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나는 사실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게 참 중요했다. 그런데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나'의 행복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대인은 늘 피고석에 앉아있으면서 모든 사람을 상대로
자기 자신을 해명해야 하는 그릇된 표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에서
이 책에서 작가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지인들에게 자주 하는 조언이 있다. 거울을 마주하고 나의 얼굴과 몸을 관찰하고 참 예쁘다고 칭찬해주라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존재 자체로 아름답고 귀한 것이 아니라 어떤 능력이 출중할 때에만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제는 그렇게 사는 것이 버겁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들'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삶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나'와 친해지기 위해서 명상도 해보고, 내 커리어와 상관없이 그냥 내가 해보고 싶었던 악기를 배워보기도, 운동을 다녀보기도, 이렇게 글을 써보기도 한다. 별일 아닌 것에도 크게 의미 부여해서 잘했다고, 너 대단하다고 스스로 칭찬도 해본다.
아직도 너무 어렵다. 아직도 남들의 기준과 평가에 휘청인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내가 또 남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구나'하는 것을 조금 더 빨리 알아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읽으며 "나는 누구의 시선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한 문장이 가장 인상 깊게 남았다. '나' 자신과 친해지는 것도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리고 '나'와 친해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20대를 겪으며 알게 되어 참 감사하다. 그러니 30대는 온전히 '나의 시선'으로 살아내고 싶다.
안다는 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 않아요. 그러나 깨달음은 아픕니다.
당신이 어떤 사실을 알았는데 아프다면 당신은 깨달은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