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 Aug 31. 2022

엄마의 엄마가 될 수 있다면

빈자리의 가치

어린아이들은 엄마 아빠 역할 놀이를 할 때 집에서 보고 들은 대로 똑같이 흉내를 낸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엄마, 아빠의 모습을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자신의 부모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어린 날의 나도 그랬으니까.


어린 시절 엄마만 갖고 있는, 엄마만 할 수 있는 '그것'이 너무나도 부러워서 가만히 지켜만 보다가 수줍게 고백한 적이 있다.


"엄마... 나도 그거 하고 싶어. 나는 언제부터 할 수 있어?"


수줍은 고백의 정체는 브래지어였다. 지금은 갑갑해서 한시라도 빨리 벗고 싶어 하는 그것을 그때는 하루빨리 차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이 답답한 걸 왜 부러워해. 조금만 있으면 필요한 날이 올 거야. 그때 엄마가 예쁜 걸로 사줄게. 조금만 기다려~"


하루는 엄마의 동네 친구분들과 함께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가족들과 식사할 때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엄마가 칼국수를 떠 와서 파를 다 건져내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내 그릇에 동동 떠다니는 파들을 하나하나 건져냈다. 그러자 엄마의 친구 한 분이 그 모습을 귀여워하며 한마디 하셨다.


"아이고~ 엄마랑 딸이랑 똑같네."


그 말이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엄마랑 똑같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지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똑같이 하고 싶어 하던 열성팬이 엄마를 절대 닮지 않겠다고 돌아선 것은 머지않은 사춘기 시절부터였다. 입학식에, 학부모회에, 운동회에 함께 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서운했다. 때로는 외할머니가, 때로는 아빠와 동생이 와주곤 했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나도 엄마와 함께 그 시간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하루는 엄마가 우리 남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여 셋이 모여 앉았다. 엄마에게는 승진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고 일에 좀 더 몰두하고 싶은데, 그런 엄마를 응원해 줄 수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내 나이 17살 무렵이었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학교에만 있다가 오는 내가 엄마의 꿈을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반짝이는 두 눈이 원망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음속 어딘가에 나는 커서 그런 엄마가 되지 않겠노라고, 집에서 항상 아이들을 맞이하고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잘 잡는 엄마가 될 거라는 다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엄마의 몸속에 암이 전이되기 시작하고 병원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무렵, 엄마는 우리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자식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한 것들이 후회가 된다고. 다 나아서 병원을 나가기만 한다면 꼭 못다 한 역할들을 해낼 거라고 말이다.


 말이 잘못됐다는 것을   엄마가 돌아가시고 3년쯤 지난 뒤였다.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도 엄마 생각은 어느  갑자기, 뜬금없이 떠오른다. 그날도 보통의 하루였고, '그런데 엄마가  우리 가족에게 미안해야 하지?'라는 의문이 두둥실 떠올랐다.


- 엄마는 나를 장장 19시간이라는 진통 끝에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했다.
-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악기들을 원 없이 배울 수 있게 도와주셨다.
- 엄마는 내가 조금이라도 아플 때면 누구보다도 호들갑을 떨며 병원에 데려가곤 했다.
- 엄마는 내게 친구 문제가 생겼을 때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다.
- 엄마는 주말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딸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기 위해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빠트리지 않고 보온 도시락을 챙겨다 주셨다.
- 엄마는 자취를 하는 다 큰 딸을 위해 때마다 반찬과 국을 소분해 보냈다.
- 신실한 믿음이 있으셨던 엄마의 기도제목 1번은 항상 우리 남매 차지였다.


엄마가 건강하게 살아계셨다면, 엄마가 우리에게 못해준 것보다 해준 것들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좀 더 늦게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엄마 역할을 충실히도 해내고 있었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후 내가 우리 집의 장녀라는 이유로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씩 채워야 한다는 조언을 자주 들었다. 엄마를 닮아서 무엇이든 잘할 거라는 말조차도 부담스럽게 느끼던 나였는데, 심지어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말은 내게 너무나 무겁고 버거웠다.


시간이라는 약을 먹으며 마음이 튼튼해진 나는 그것이 서툰 사람들의 서툰 조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빈자리는 비어있을 때 의미가 있다. 엄마는 사라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다행히도 그 빈자리 덕분에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는지도 알게 됐다.


30대가 된 나는 엄마가 가정과 일 사이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는지 안다. 요즘엔 환생이라는 게 실재한다고 믿고 싶다. '이곳의 소풍을 먼저 끝낸 엄마가 나의 자식으로 환생한다면?'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곤 한다. 그때는 엄마가 원하는 것들을 맘껏 배우고, 누리고, 펼치며 살 수 있길 바란다. 꿈을 펼치는데 적어도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 삶이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말(言)은 힘이 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