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통성은 사랑이 됐다.
엄마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만 그중에서 가장 강조하셨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은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발음하기도 어렵고 낯선 단어 융통성. '융통성 있게' 일처리를 하려면 상황에 따라 눈치껏 해야 하는 부분도 있어 어린 나는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융통성(融通性)
1. 금전, 물품 따위를 돌려쓸 수 있는 성질.
2.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 또는 일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는 재주.
9살 무렵 천방지축 꼬마였던 지연이는 엄마로부터 집 앞 빵집에서 식빵을 사다 달라는 심부름을 이행하러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딸랑 울리는 문에 걸린 종소리와 함께 빵집에 입성. 따뜻하고 고소하고 달콤한 빵 냄새들 사이를 비집고 내 키보다 높았던 식빵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안타깝게도 부지런한 주민들이 식빵을 모두 사간 뒤였고, 그 자리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모닝빵 여러 개가 한꺼번에 담긴 봉지가 눈에 띄었다.
나는 사실 식빵보다는 모닝빵을 더 좋아했다. 왠지 모르게 모닝빵 겉에 갈색 껍질 같은 부분을 떼서 먹는 게 고소하고 맛있었다. 모닝빵을 햄버거 입을 벌리듯 반으로 갈라 딸기잼을 바른 뒤 우유와 함께 먹는 게 당시 최애 간식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모닝빵을 사가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한 논리적인 근거를 떠올려 냈다. 식빵도, 모닝빵도 모두 밍밍한 빵이고, 잼 발라 먹는 것도, 우유랑 같이 먹는 것도 비슷한 점이 많다고 결론을 내리고 모닝빵을 사들고 집에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나는 모닝빵을 엄마에게 건네며 이걸 사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다. 내가 식빵을 사 오지 못해서 엄마가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엄마는 오히려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려 꼭 안아주셨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연아, 이게 바로 융통성이야! 식빵이 없으면 모닝빵을 대신 사 오는 것. 그게 바로 융통성이란다. 정말 잘했어. 똑똑하고 예쁜 내 딸."
갑작스러운 칭찬에 어리둥절했고, 여전히 융통성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후로도 나는 융통성 하면 식빵 대신 모닝빵을 사간 그날의 사건을 떠올린다. 엄마에겐 미안한 사실이지만 내게 그날의 사건에서 융통성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날 정남향이었던 우리 집 거실 전체로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반짝이던 엄마의 눈빛과 기뻐하던 함박웃음, 그리고 따뜻했던 엄마 품의 온기와 같은 것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 기억 덕분에 융통성이라는 단어는 엄마의 사랑으로 내 가슴속에 남을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