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루리 글·그림
연말부터 책태기가 세게 와서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탓이다. 간절히 기다리는 일이 생긴 후로는 하루하루 시간도 더디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이럴 땐 역시 얇고 가벼운 책이지.' 하며 작년부터 꽂아두었던 동화책 한 권을 펼쳤다.
알록달록한 삽화와 함께 책을 읽으니 마치 라이언킹 영화를 보는 듯했고, 동화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있어 술술 읽히는 책을 아끼고 아껴 봤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미지의 세계로
코뿔소 노든이 코끼리 고아원에서 살던 시절은 참 평화롭고 행복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코끼리는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었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되는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노든의 코가 길게 자라지 않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노든은 궁금했다. 왜 자신에겐 긴 코가 없는 건지, 왜 자신에게는 하얀 뿔이 있는 건지. 바깥세상이 궁금했지만 안전하고 평화로운 코끼리 고아원도 충분히 좋았기 때문에 항상 코끼리답게 생각해 보려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자신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사실만 분명해질 뿐이었지만.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 그래.
노든처럼 내게도 그런 곳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떠나기 싫어도 떠나야만 하는 곳 말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무엇이든 스스로 잘 해내는, 독립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컸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게 다 엄마가 뒤에서 물심양면 도와주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착각인걸 알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돼.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로 남들이 멋있다고 하는 걸 쫓아가며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 어딘지도 모르는 그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느라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다 놓치며 살 순 없어. 억지로라도 멈춰야 해.'
마치 예수님 탄생을 기점으로 역사가 둘로 나뉘는 것처럼 내 삶도 엄마와의 이별을 기점으로 모양과 색깔이 많이 달라졌다. 스무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까무러치게 놀랄 것이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고, 한심하게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냐며 난리 칠 게 뻔하다. 하지만 굽이굽이 흘러 지금의 내가 된 것이 마음에 쏙 든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책을 읽으며 긴긴밤이 꼭 '삶' 자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긴 밤처럼 삶도 때론 두렵고, 외로우며, 길고 지루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캄캄한 밤하늘에도 달과 별이 빛을 내고, 멈춘 것만 같은 시간도 공평하게 흘러간다. 지구상에 태어난 생명이라면 모두가 때론 홀로, 때론 함께, 사랑하고 서로 기대며 긴긴밤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길고 긴 밤을 잘 견뎌내 보라고 친구도, 이웃도, 부부도, 가족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진정한 내가 되는 여정은 주어진 삶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지금껏 흘러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실수도 많았고, 미숙한 점도 많았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잘 살아왔다고 느껴진다. 5년 뒤, 10년 뒤, 20년, 30년 뒤에도 지금의 나를 되돌아봤을 때 떳떳한 마음이 들길 원한다. 그래서 오늘도 일하고, 읽고, 쓰고, 사랑하고, 반성하고, 보듬어 본다. 그렇게 오늘도 나의 최선으로 긴긴밤을 지새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