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내가 함께 익어간 시간들

구조적인 글쓰기

by 사월

최근 들어 내가 생각보다 느리고 더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전까지는 나는 내가 무슨 일이든 빠르게 처리하고, 신속하게 결정하고 판단하는 편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한의원을 운영해 보면서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고, 그간 그런 줄도 모르고 일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재촉하고 채근만 했던 게 새삼 미안해졌다.


개원 2주년을 맞이해 지난 2년을 돌아보니 조금 느리긴 해도 그간 내가 많이 성장하고 변화했다. 일단은 무려 1년여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비로소 내가 한의원의 '대표 원장'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금껏 직원으로만 일하면서 갖고 있었던 직원의 태도에서 주인의 태도로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동료가 없는 직종이다 보니 작은 것 하나를 결정할 때도 상의할 곳이 없다는 게 힘들었고, 누군가 나의 결정을 컨펌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막막하고 두려웠다. 예를 들면 한약 파우치 디자인을 결정하는 사소한 선택 앞에서도 몇 날 며칠을 망설였고, 그런 고민들이 쌓이고 쌓여 처음 1~2달은 자정이 되어서야 간신히 퇴근하곤 했으니까. 지금도 선택이 쉬운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어느 정도 선까지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조금은 알게 돼서 번거롭더라도 딱 내가 가능한 선까지만 시도해 보고 책임지는 연습을 계속해서 하는 중이다.


사람에게 낯을 가리듯 공간에도 낯가림이 있는 걸까? 그렇게 우당탕탕 1년이 지나고, 이제 만 2년을 꽉 채우고 나서야 이 공간도 비로소 내 공간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내가 만든 공간이 아니었고 남이 하던 업장을 이어받아 시작해서 그런지 대표로서의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도 꼭 남의 업장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기분이 자주 들곤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 공간을 더 나답게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고.


처음 한의원을 양수받자마자 한 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 벽지와 인테리어들을 뜯어고치는 일이었고, 원장실과 치료실의 구조도 조금씩 수정했다. 한의원을 쉬면서 진행했던 일이 아니라서 이미 그 정도 만으로도 지칠 대로 지쳐 그 이후에 더 세밀한 부분들은 손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몇 개월이 흐르고 눈에 계속 거슬리던 장식장 안의 내용물을 좀 더 내가 원하는 구성으로 바꾸고, 한의원으로 들어오는 복도에 게시되어 있던 광고물도 정말 내가 홍보해보고 싶은 내용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장식장.jpg


대기실 한편에 블랙보드를 만들고 한의원 치료와는 전혀 무관한 이 달의 한 줄을 정해 내가 보고 싶고, 환자들에게도 들려 드리고 싶은 문구를 하나씩 적기 시작한 것도 공간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 매달 계절에 맞는 그림을 보고 싶어서 달력도 바꾸고, 매일 배달되던 경제 신문과 신문사에서 공짜로 주던 잡지 구독도 취소했다. 그 자리는 내가 좋아하는 '좋은 생각' 잡지로 대신했고, 지금은 환자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들도 내놓으려 구상 중이다.


이달의 한줄.jpg
좋은생각.jpg


한의원을 양도하셨던 전 원장님께서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으셔서 창고며 탕전실이며 공간이 남는 곳이라면 모든 곳이 쓰지 않는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개원 초기에도 폐기물 업체에 문의해 그런 공간을 비워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무려 200만 원이라는 견적이 나와 포기했더랬다. 올여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근처 고물상들에 다시금 연락하는 용기를 냈고, 2년 전 폐기물 업체에서 200을 불렀던 작업이 겨우 20만 원에 마무리될 수 있었다. 비워진 창고와 탕전실을 보는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창고정리.jpg 고물들 이사가던 날


올 9월, 개원 2주년을 맞이해 환자분들께도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챙겨드렸지만 무엇보다도 개원 초기에 도움을 주신 많은 지인분들께 편지를 쓰고 약소한 감사 선물을 챙겨드렸다. 이게 다 편지를 쓰면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다 깨닫게 된 일들이다.


그동안에는 이미 자리 잡은 남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왜 이리 부족하기만 할까' 자책을 많이 했는데, 지난 2년간 내 나름대로의 속도로 내게 주어진 역할과 이 공간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낯가림이 심한 나라서 이렇게 또 긴 시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덕분에 비로소 몰랐던 나에 대해서도 발견하고 친해진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제야 알았으니 앞으로는 새로운 일 앞에서 나를 너무 재촉하지 말고 차근차근 해내면 된다고 다독일 줄도 알아야겠다. 쉽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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