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들은 대체로 입이 짧은 편이다. 아빠도, 큰아빠나 고모들도, 친척 언니, 오빠들도 대부분 그랬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친가 식구들을 빼닮아 존재감을 뿜뿜 드러냈다. 42주를 꽉 채우고 느릿느릿 태어났는데도, 체중이 2kg 대여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고 한다.
작디작았던 아기는 인큐베이터에서 탈출해 세상 빛을 본 지 19일째 되는 날, 구토와 설사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다른 특별한 질병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상세불명의 장염이었다. 그러나 신생아에게 장염은 치명적이다. 아직 세상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아기에게 탈수를 일으키고, 생명에도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아기와 이른 작별인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사 선생님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모든 친척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때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그 아기는 건강하게 살아남아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30살이 넘어선 지금까지도 친척 어르신들께 ‘죽다 살아난 아이’로 불리곤 한다.
요즘 소식좌가 떠오르는 대세다. 유튜브에도 소식좌들의 영상들이 올라오고 인기를 끈다. 여전히 입이 짧고 배탈도 잘 나는 편인 나는 먹방의 재미를 몰랐다. 그래서 소식좌들의 반란이 내심 반갑다. 적게 먹거나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받고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맛있는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먹는 것은 미덕이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tv를 틀기만 해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가족들 중에는 먹방을 굳이 찾아서 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투병 생활을 하던 엄마가 한참 '맛있는 녀석들'을 챙겨보시곤 했다.
그때 엄마는 암이 온몸으로 전이돼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상태였다.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라 아빠가 구해오시면 한 숟갈만 떠먹어도 바로 구토를 했다. 긴 시간을 먹지 않고도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눈부신 의학의 발전 덕분이었다. 흰색 우유같이 생긴 수액이 먹지 못해도 생존을 가능케 했지만, 엄마의 팔에는 더 이상 수액 바늘을 교체할 혈관이 남아나지 않게 됐다.
엄마가 먹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 3개월이 되어갔다. 그날도 맛있는 녀석들을 집중해서 보고 계신 엄마에게 내가 물었다. “엄마, 먹지도 못하는데, 남이 먹는 거 보고 있으면 너무 괴롭지 않아?” 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무겁고 먹먹했다.
잊어버릴까 봐, 까먹기 싫어서 봐.
보면 맛이 상상은 되잖아.
그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3달 넘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영양제 수액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는 사람의 심정을 몰랐다. 어떤 이들은 디톡스를 위해 며칠씩 단식도 한다는데, 하루도 굶어본 적 없는 나는 솔직히 지금도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 그저 ‘그런 상황이 되면 맛을 잊지 않기 위해 남이 먹는 것을 볼 수도 있는 거구나.’하고 슬픈 짐작만 할 뿐이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떡볶이의 매콤함과 호박죽의 달짝지근함, 그리고 추어탕의 얼큰함을 기억하고 있을까?
보지도 않으면서 먹방 유튜버의 채널 하나를 구독해 두었다. 구독 목록에서 새 영상이 올라올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한다. 아무에게도 공감받기 어려웠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