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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Aug 12. 2023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장편소설

작년에 화제가 됐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나온 지 1년이 다 지나서야 읽었다. 이 글은 책을 읽으며 생각했던 우리 아빠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혼하고 본가에서 나와 살면서 아빠에 대해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많았다. 일단 남편이 우리 아빠를 너무 좋게 생각한다. 아빠의 좋은 면들을 크게 사는 남편에게 고맙기도 하고, 아빠의 나쁜 면들만 잔뜩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 미안해지는 순간도 많다.






지독하게 말이 없는 아빠가 미웠다. 엄마는 결혼해서 아빠의 형제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들 서로 싸웠나?' 생각했었다고 했다. 거실에 둘러앉아 애꿎은 바닥을 내려다보거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응시하며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있었다나.



딱히 놀라운 풍경도 아니다. 명절에 온 친척이 모여도 떠드는 사람은 며느리들이나 사위들 뿐이었으니까. 형제들끼리만 모여있으면(그러니까 내게는 큰아빠들이었는데) 누구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고모들이 오면 그나마 조금 나았지만 몇 마디 웅얼웅얼하는 게 다였다.



올해 1월, 설날을 일주일 앞두고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도 그런 말을 자주 하셨다. 시집와서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고. 시댁 식구들이 뭐라고 말을 하는데 웅얼웅얼 들리지도 않고, 잘 못 들어서 다시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해줬다고. 너무 서러웠다고. 그러다 한 번씩 우리에게(그러니까 손주들에게) 버럭 하고 화를 내는 거다. "웅얼거리지 좀 마! 잘 들리게 큰 목소리로 말해!" 그러니까 유난히도 말이 없고, 목소리도 기어들어가는 건 경주 김씨들 피에 새겨진 유전자 같은 것이었다.



그랬던 할머니가 손녀사위를 어찌나 맘에 들어 했는지 모른다. 남편은 목소리가 정말 크기 때문이다. 크기 자체도 크지만 몸 안에 무슨 확성기가 달렸는지 울림 자체가 커서 시원시원하다. 시댁에 가보면 온 식구들이 다 화통하고, 표현이 많고, 말도 많다. (남편은 또 그걸 싫어한다. 좋을 땐 좋지만 나쁠 땐 한없이 나쁘다고. 자긴 그냥 아무 일 안 일어나도 되니까 심심한 게 좋단다.) 남편이 조잘조잘 말도 많고, 대답도 시원시원하게 잘 하고, 항상 웃는 표정이니 할머니 눈엔 그렇게 예뻐 보였나 보다.



그런 남편은 우리 아빠의 잠금을 푸는 방법을 안다. 소주 2잔. 딱 소주 2잔만 들어가면 무겁게 잠겨 있던 입이 술술 열린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정말 사위랑 있으면 별의별 얘기를 다 한다.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부터 우리 남매 어릴 때 이야기, 엄마랑 연애할 때 있었던 일, 할아버지와 있었던 일, 친구들이랑 골프 치러 가서 있었던 일까지 모두. 내가 30년간 들었던 아빠의 말보다 남편이 아빠에게 들은 말이 더 많을 거다.



그런 걸 보면 아빠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그냥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일 뿐. 이렇게나 속에 많은 이야기가 고여있었는데, 여태 말 안 하고 답답해서 어떻게 살았나 싶을 때가 많다. 그런 아빠의 다른 면을 많이 봐서 그런지, 아니면 서로 좀 떨어져 살면서 나도 모르게 쌓였던 불만이 많이 녹아서 그런지, 요즘은 말이 없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미운 감정보다는 서툰 그 모습이 그저 애틋하기까지 하다.(그러다 한 번씩 속 뒤집어지게 하는 일이 생기면 여전히 화가 나긴 하지만...)



어쨌든 책을 읽으며 아빠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아빠의 모습, 내가 아는 아빠의 모습, 내가 알게 될 아빠의 모습, 영원히 모를 아빠의 모습까지. 아빠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래도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이해되는 부분이 늘어서 참 좋다. 미움이 줄어드니 말 한마디를 해도 좀 더 부드럽게 건네게 된다. 톡톡 쏘아붙이는 딸과 자기만큼 무뚝뚝한 아들을 데리고 아빠도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그래서 요즘은 참 고맙다. 그런 사람이 아빠여서. 우리가 가족으로 만날 수 있어서.



참 희한한 관계다. 가족이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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