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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Oct 02. 2019

너와 나누지 못한 말들은 얼마나 많을까

<벌새>_나도 영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소위 꽂히는 영화를 만나게 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영화관을 찾고, 하드 디스크 속 영화를 찾아보고 또 보기를 반복한다. 예전에는 무조건 보지 않은 영화, 새로 개봉하는 영화만을 찾아다니기 바빴는데, 이제 취향이 좀 변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때는 놓쳤던 인물의 대사, 인물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 눈빛 속에 담겨 있는 감정을 두 번, 세 번 보면서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상상 이상으로 좋았기 때문에. <벌새>는 아직 보지 못한, 이제 막 개봉한 영화였지만,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아, 이 영화는 앞으로 여러 번 곱씹으며 내 머릿속을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는 영화가 되겠구나.






벌새

 <벌새>를 보며 신기한 경험을 했었다. <우리집>을 보며 느꼈던 감정을 <벌새>에서도 똑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잘 몰입하지 못한 채 영화를 보게 되는 느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서 계속 거부하고 싶어 지는 마음. 그런 마음이 영화 초반 부분을 보며 똑같이 느꼈었다.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다툼을 큰 스크린을 통해 보게 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시작부터 거부하고 싶어 지는 느낌을 받아서 일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며 영화에 대한 감상을 더듬어보고 있는데, 머리에 물음표만 수십 개 떠오를 뿐 도저히 명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분명 너무 좋았는데, 좋은 느낌을 받았는데, 뭐라고 딱 한 단어로 영화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몸과 마음에 아련하게 남아 있는 기운 때문에 집을 가기 위해 탔던 버스에서 무작정 내려 집까지 한참을 걸었다. 한참을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다 내린 결론은 이 영화는 한 번 더 봐야 정확히 감상을 내릴 수 있겠다,였다. 다시 영화관을 찾아 영화를 보자, 두 번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영화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오랫동안 <벌새> 앓이를 하게 되겠구나.



나는 이 세계가 궁금했다.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



너와 나누지 못한 말들은 얼마나 많을까

 영화의 주된 테마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관계'이지 않을까 싶다. 중학생의 어린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성인이 된 지금의 나로 대입해도 무방할 정도로 사람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사회 속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나 자신과의 관계까지 영화는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영화의 초반, 은희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관계는 가족일 것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퍽하면 손부터 올라가는 오빠, 사춘기를 겪으며 떠돌아다니는 언니, 그리고 이러한 가족들을 돌보기 바빠 은희를 바라보기 벅찬 엄마까지. 은희는 이러한 가족 사이에서 언제나 소외되고 외면받기 일쑤이다. 그렇기에 은희는 가족에서 느낄 수 없는, 느끼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결핍을 외부의 관계에서 찾으려 노력한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단짝 친구, 풋풋한 사랑을 나누게 되는 남자 친구,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사랑 고백을 하는 후배까지 은희는 자신에게 필요한 마음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관계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사람에 대한, 관계에 대한 경험을 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마저도 연신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은희 앞에 영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은희는 비로소 조금씩 깨닫게 된다.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야지만 자신의 존재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도 충분히 버텨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우게 된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알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 걸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꽤나 오랫동안 알고 지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눴기에 나는 너를 다른 누구보다 완벽하게 알고 있다 자부하게 될 때. 너의 행동과 생각은 언제나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예측. 내가 가지고 있는 너에 대한 마음만큼, 너 역시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오만함. 그렇게 누군가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자만심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 관계의 오류가 생겨나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관계의 오류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도 있다.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나라는 존재에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거라는 예측이 빗나가는 순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내가 몰랐을 뿐,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함께 TV를 보고 있는 가족의 모습처럼 세상은, 사람과의 관계는 은희의 예상과는 다르게,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렇기에 세상은, 사람은 은희를, 나를, 우리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좋은 마음이 어느 순간 미운 마음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것처럼, 증오하는 감정이 어느 순간 연민의 마음으로 가닿게 되는 것처럼 사람에 대한 마음은, 상황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변덕스럽게 변화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마음의 변덕과 상황으로 인해 서로 나누지 못한 말들은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풀지 못한, 가닿을 기회조차 얻지 못함으로 인해 너와 나누지 못한 말들은 얼마나 많은 걸까. 의외의 기회로 오해를 풀게 되는 순간만큼이나, 그 의외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순간 역시 많다는 것을 영지와의 이별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만나게 되면 모두 다 말해주겠다'는 영지의 말이 끝내 지키지 못한, 지킬 수 없는 공허함 울림만을 남기게 되는 것처럼 언제나 우리는 관계의 끝이, 너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기회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나도 영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영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영화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영지였다. 은희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다시 홀연히 사라진 인물. 신비로운 기운을 가득 품고 있는 영지라는 인물은 정말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 맞는 걸까, 혹시 은희가 꿈속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이 아닐까 의구심을 품게 될 정도로 인물에 대한 모호한 기운이 가득하다. 마치 세상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지만, 은희에게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강력한 흔적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누군가에게 지금의 힘듦을 견디게 하는, 버티게 하는 힘을 주는 것만큼 값진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충분히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 혹은 버텨내기 힘든 일이라면 가끔은 뒤로 물러서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다는 것. 다행으로 누군가가 필요한 그 타이밍에 내가 너의 옆에 있다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거라고 영지라는 인물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엔 영지, 같은 사람이 나에게도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넌 꽤 나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지금 잠시 주춤거리고 있는 내가 다시 한번 버티는 힘을, 견뎌내려는 의지를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본 후, 감상에 젖어있을 때 떠오른 생각은 내가 누군가에게 영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희망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 누군가의 힘듦을 말없이 들어주고 공감해주며 나의 생각과 이야기를 꾸밈없이, 덧붙임 없이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내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마지막 엔딩 부분에 나오는 영지의 내레이션 부분이다. 엄마가 싸준 김밥을 손에 들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은희와 그런 은희 위에 덧대어지는 영지의 담담한 목소리.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은희가 겪은 일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담담한 어조로 읽어 내려가는 이 내레이션은 마음속에 굉장한 울림을 전해준다. 우리는 항상 어떠한 상황 속에 참여하거나 참여당하게 된다. 그 일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누다 상처 받고 상처 주고, 오해를 받고 오해를 하며 살아가게 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맞았던 일이 오늘이 되면 틀린 일이 되는 것을 마주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생각하게 된다, 영지의 말처럼.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걸까. 누군가에게 받게 된 상처 때문에 관계의 회의감을 느끼게 되다가도, 어느 날은 누군가에 의해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처럼 정답 없는 삶에는 두렵고 무서운 일만큼이나, 신기하고 아름다운 일 또한 무궁무진하게 피어난다. 그렇기에 상처 받게 되더라도 삶은 살아볼 만하다고,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혹시 지금 그대에게 힘든 일이 생겼다면, 잠시 고개를 돌려보세요. 그대 옆자리 어딘가에 분명 기쁜 일이 함께 하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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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막연함에 속았다> 출간 기념 연재

매주 화요일, 책에 담겨 있는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제 1화 <관계를 망치고 있던 건 바로, 나였다>

제 2화 <누군가의 취향을 알아간다는 것>

제 3화 <맥주를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제 4화 <꿈을 포기할 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제 5화 <어린아이처럼 울고 싶은 순간이 있다>

제 6화 <집순이는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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