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월극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 Oct 09. 2020

어른이 된다는 건

<프란시스 하>_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

프란시스

섣불리 마음을 단정 짓고 싶어 질 때가 있다.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사람은 분명 나와 똑같은 사람일 거라고 무턱대고 믿어버리고 싶어 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울 메이트가 바로 이 사람일 거라는 믿음 하나로 덥석 생각보다 큰 마음을 떼어줄 때가 있다. 덥석 떼어준 마음만큼이나 조잘조잘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 진다. 조잘조잘 모든 걸 털어놓은 만큼 그 사람의 모든 조잘거림도 듣고 싶어 진다. 그럼으로써 다른 누구보다 그 사람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싶어 지기도 한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이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쌍둥이 같은 존재야,라고 으스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무턱대고 시작한 것들에는 결함이 존재하기 마련인 것을 잊어버린 탓에 자꾸 의도치 않은 상처를 만들어 내고 흉터를 키워나간다. 우리는 세상에 유일한 존재가 되기를 희망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기를 꿈꾼다. 그리고 먼 훗날 그 사람을 만나 완전한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애석하게도 소망은 언제나 소망인 채로 끝이나 버리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는 법을 어설프게나마 배울 수 있게 된다.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상처 위에 새살이 돋듯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것이다.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에서 둘도 없는 친구 소피와 살고 있는 27살 뉴요커 프란시스.
무용수로 성공해 뉴욕을 접수하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지만 현실은 몇 년째 평범한 연습생 신세일뿐이다. 사소한 말다툼 끝에 애인과 헤어지고 믿었던 소피마저 독립을 선언하자 그녀의 일상은 꼬이기 시작한다. 직업도, 사랑도, 우정도 무엇 하나 쉽지 않은 그녀는 과연 당당하게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가장

보통의 뉴욕에서 만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는 공원에서 다투는 프란시스와 소피의 몸짓으로 시작된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정말 싸우는 듯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지만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둘만의 규칙이 정해져 있는 듯 여기는 안돼, 저기는 안돼 외치며 두 사람은 우리만의 놀이를 이어나간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영화는 그들의 삶을 나열한다. 소피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는 프란시스의 모습, 지하철을 기다리며 혹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재잘거리는 모습,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들고, 책에 나오는 인상적인 문구를 낭독해주고,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행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창문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나 함께 게임을 하고, 빨래방을 가고, 늦은 밤 영화를 보다 잠이 들게 되는 모습까지 두 사람은 가족처럼 아니,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내 것과 네 것이 구분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던 두 사람은 소피의 이사로 조금씩 서로 알지 못하는 일상이 생기기 시작하고 마음의 빈틈이 조금씩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어릴 적의 난 누군가와 가까워져야 한다면 친구와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연애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사랑은 믿지 않았다. 타인 중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친구뿐이라 여겼고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마음속에 품은 꿈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미련할 정도로 꿈에 매달렸고 구차하다 싶을 정도로 친구를 그리워했다. 마음을 떼어주는 것을 아까워하진 않았으나 자주 서운해했고 꿈이 천성과 맞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쉬이 포기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언제나 질질 끌려다니는 게 일이었고 충동적인 결정에 서스름이 없었다. 맥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책으로 꾸역꾸역 채워나갔고 이마저도 쉽지 않을 땐 걷고 또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를 단비 같은 존재라 여기면서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구질구질한 모습은 자존심을 세우며 끝까지 감췄다. 속마음을 알려달라는 친구의 말에 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진심을 회피하기만 했고 마치 인생을 다 살아봤다는 듯 삶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토록 누군가와 가까워지기를 간절히 바랐으면서도 그 누구와도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겠다는 마음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에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어려웠고 힘들었고 아팠다.


시시콜콜한 일상을 함께 나누던 소피가 이사를 떠나자 프란시스는 자신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쌍둥이라 여기며 내 것처럼 생각했던 소피는 사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세계를 접수하는 유명한 무용수가 되겠다는 큰 포부는 여전히 연습생의 자리에 머문 채 저 먼발치에 있다. 진정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은 레브와 벤지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지만 꿈꾸던 예술가의 삶을 누리기보단 매번 월세값에 허덕이게 되고 미래를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콜린은 무용수의 꿈을 포기하고 사무직 자리를 권한다. 카드 빚을 내면서까지 충동적으로 떠난 파리에서 늦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시간을 모두 날려버리고 소피와 재회할 수 있는 기회까지 놓쳐버리고 만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며 기숙사 조교 일과 웨이트리스 일로 돈을 벌지만 꿈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고 학교에서 우연히 재회한 소피와 예전처럼 지내길 꿈꾸지만 소피는 현실의 무게에 이미 훌쩍 커버린 뒤다. 꿈과 현실의 기로 앞에 서게 된 프란시스는 진정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부족하고 멍청한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 바보 같아 보이는 나 자신도 기꺼이 껴안아 보겠다 손을 내미는 것. 내 욕심을 채워주지 못하는 나 자신을 쉬이 탓하지 않는 것. 남보다 못한 나를 그럴 수 있다 위로해주는 것. 내가 나를 책임지는 것. 그리고 이렇게 미숙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겠다 선언하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어릴 적 상상 속에 존재하는 반짝반짝한 내 모습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구차해지고 미련 맞아 보이고 치사하고 치졸해지고 간사해지는 구질구질한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되는 일 일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욕심을 조금 덜어내고 나를 위한 마음은 단단히 채워 넣으면서. 프란시스는 직접 무대에 서는 무용수의 꿈은 포기했지만 직접 창작한 무용을 선보일 수 있는 일과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일을 병행하는 삶을 택한다. 그 일을 선택한 프란시스는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고 근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한 프란시스는 소피와의 관계에서도 이전과는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몸싸움 놀이를 하며 서로의 살을 부대끼지 않아도, 모든 일상을 시시콜콜 공유하지 않아도 먼발치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레이철의 가족들과 술을 마시며 프란시스가 말했던 이상적인 관계의 모습처럼.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한 프란시스는 자기만의 공간을 두 팔 벌려 가늠해본다. 내가 이렇게나 훌쩍 자랐구나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아직 어수선한 방 안에서 프란시스는 흰 종이 위에 자신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또박또박 써 내려 간 이름을 가위로 잘라내고 설레는 얼굴로 아파트 우편함으로 달려간다. 이름 없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우편함 한가운데에 프란시스는 이름을 적은 종이를 꽂아 넣는다. 비록 절반뿐인 이름이지만 프란시스는 이제 스스로의 이름을 새겨놓을 수 있을 정도로 어느새 훌쩍 자라났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처음 이 영화를 알게 되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스물네 살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조금 자라나긴 했을까. 조금이라도 나아가고 있는 걸까. 여전히 프란시스처럼 마음 깊은 곳에 꿈을 담아놓을 정도의 용기는 갖지 못했지만 적어도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전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는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뭐든 기꺼이 안아주고 보듬어주어야 한다는 마음 하나는 조금 알게 되었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며 흑백의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프란시스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꿈에 벅찬 얼굴로 소리를 내지르며 꿈을 향해 달려 나갔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도 조금 즐길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프란시스처럼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내가 선택한 내 일을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사월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처음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