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월극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 Nov 06. 2020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걸후드>_내 행복은 내가 알아서 찾을게

걸후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달리고 있다 느껴질 때가 있다. 분명 이 터널만 지나면 끝이 보일 것 같았는데, 밝은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짙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느껴지는 순간이. 힘주어 달려도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그 순간 속에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벽에 기대 소리 내어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쩌면 태어난 그 순간부터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원망이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물과 함께 퍼져나간다. 복받쳤던 울분과 설움을 눈물과 함께 쏟아내고 조금씩 잦아지는 호흡과 함께 이윽고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아갈 거라는 것을.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또다시 눈물짓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질 때가 찾아와도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다시 힘내어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 두 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소의 뿔처럼 내달릴 거라는 것.


“내 꿈이 어디 있는지 말해줄래?”

홀로 생계를 이끄는 엄마를 대신해 두 동생을 보살피고,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오빠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 버텨내는
'마리엠'은 파리 외곽에 살고 있는 16세 소녀다.

집과 학교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그는
자유로운 영혼의 세 친구 ‘레이디’, ‘아디아투’, ‘필리’를 만나
‘빅’이라는 이름을 얻고 차츰 변화해 나가는데…

 마침내, 현실을 딛고 진짜 원하는 나를 찾아 나선 '마리엠'의 찬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는 거칠게 몸싸움을 하며 미식축구를 하는 마리엠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선수들과 거칠게 어깨를 부딪히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맹렬한 기세로 경기에 임하던 마리엠은 경기가 승리로 끝이 나자 포효하듯 환호성을 내지른다. 마치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듯 환호성을 내지르던 마리엠은 경기가 끝난 현실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마리엠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경기를 했던 친구들 역시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던 경기장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어두컴컴한 밤을 경계하며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집이 가까운 친구들끼리 무리 지어 길을 걷거나 길거리에서 괜한 시비를 거는 남자들을 모른 척 무시하기도 해야 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리엠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홀로 생계를 짊어지고 있는 엄마를 대신해 어린 두 동생을 보살피고 있는 마리엠은 집에 와서도 의지할 곳 하나 없다. 툭하면 손부터 올라가는 가부장적인 오빠의 동태를 살피며 눈치를 봐야 하고 아직 서투른 것이 많은 어린 동생 옆에서 모든 것을 일일이 챙겨줘야 한다. 학교에서 역시 마리엠의 마음을 속 깊이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 누구에게도 속시원히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진정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마리엠은 우연히 레이디, 아디아투, 필리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마리엠은 레이디, 아디아투, 필리와 함께 빅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며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동생과 오빠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처럼 되지 않은 학업에서도 한 발짝 물러나 오로지 '나'에 대해 깊이 알아가기 시작한다. 또래의 친구들처럼 옷 구경을 하고, 좋아하는 남자 친구와 풋풋한 연애를 시작하고, 크고 작은 일탈들을 하면서. 빅이 된 마리엠은 세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완전해지는 경험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 역시 흐려지게 된다. 친구들과의 파티를 위해 예전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학생에게 돈을 뺏는가 하면, 레이디의 굴욕을 만회하겠다며 자발적으로 싸움을 만들어 큰 다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리엠은 그것이 진정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과의 우정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다툼과 일탈 정도는 눈감을 수 있다고. 가까스로 얻게 된 행복을 깨기 싫었던 마리엠은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애써 외면하기로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며 마리엠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깊이 깨닫게 되고 누군가에게 끌려가듯 얻게 되는 행복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얻을 수 있는 주체적인 행복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는다. 부끄럽지 않은 자신과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영화 속에서 마리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행복해지려 노력한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붙잡기 위해 스스로의 양심을 살짝 눈감기도 하고, 폭력적인 오빠에게서 동생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보호하기도 하고, 스스로 자립하기 위해 가족과 친구들과 떨어져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마리엠은 부단히 노력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누군가의 지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집에서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오빠 밑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선택한 곳에서는 보스의 손길에서 내내 벗어나지 못한다. 흑인 여성에, 이민자인 마리엠은 철저히 소외되는 약자일 뿐이다. 수없이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것에 질릴 대로 질린 마리엠은 살아 남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강구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슴에 붕대를 칭칭 둘러 감고 펑퍼짐한 옷을 입으며 남자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외적인 면을 바꾼다면 여자이기에 받았던 시선과 무시에서 멀어질 수 있을 거라 여기지만 여전히 조롱과 성적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립하기 위해 동생까지 외면하고 집을 나왔던 마리엠은 일하던 곳에서 도망쳐 나와 다시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동안 열심히 일궈왔던 일들이 모두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것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버린 것만 같은 현실에 절망한다. 어디를 가야 할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헛된 욕심을 품은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에 잠겨 떠돌던 마리엠은 다시 엄마와 오빠, 동생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향한다. 고통스럽지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을 아주 잠시나마 감사해하면서. 한참을 망설이다 벨을 누른 마리엠은 열린 문 앞에서 깊은 생각에 빠진다. 또다시 그 익숙한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정말 원하는가. 이렇게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놔도 괜찮은 걸까.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한참을 문고리를 잡은 채 주저하던 그는 이내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안락하지만 폭력적인 그곳에서. 숨죽여 눈치만 보던 지난날의 자신에게서. 그리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원망이라도 하려는 듯 벽에 기대어 흐느껴 눈물을 흘린다. 아직 보호받아야 하는 여린 소녀의 모습으로.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소외받고 핍박받는 여린 소녀의 모습으로 끝을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당차게 나아가겠다는 마리엠의 굳건한 옆모습으로 끝이 난다. 비록 아직 눈가에는 흘린 눈물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결코 세상에 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표정을 한 소녀의 모습으로.


*영화 <걸후드>의 리뷰는 영화 시사회 감상 후 올린 글입니다.




사월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어른이 된다는 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