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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Dec 30. 2020

내 몸속에서 피어오르는 너를 기억해

<애틀랜틱스>_이토록 몽환적인 사랑 이야기.

애틀랜틱스

드넓은 바다를 볼 때면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하곤 한다. 넓고 광활한 바닷속으로 들어가 있는 힘껏 헤엄을 치고 싶다는 생각과 있는 힘껏 헤엄을 치고 있는 나를 파도가 매섭게 집어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영원히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 하나. 언제나 승리하는 쪽은 후자다. 광활한 바닷속을 유유히 내저으며 헤엄을 치는 상상 하면서 나는 애꿎은 모래만 연신 밟곤 한다. 언제쯤이면 바닥이 닿지 않는 감각을 익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바닥과 멀어지는 감각에 익숙해질 수 있는 거지. 바다에 몸을 풍덩 담아내어 헤엄을 치는 상상을 해본다. 바다 위에 두 팔 벌려 누워 하늘에 비친 바다의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하늘에 비친 내 모습은 그 무엇보다 완전해 보인다.



영화는 고층 건물을 짓고 있는 공사장에서 안전장치 하나 없이 노동을 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위험천만한 노동현장에서 아슬아슬하게 노동을 이어가는 청년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이 익숙하다는 듯 덤덤한 표정이다. 거대한 빌딩을 지어 올리던 청년들은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공사장 한가운데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통화하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둘러싸며 항의를 이어가던 청년들은 답답한 마음에 사무실까지 쳐들어가지만 그곳에서도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는 건 매한가지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청년들과 같은 노동자의 입장이기에 이렇다 할 속 시원한 이야기를 전해주지 못하고 책임자만 쏙 빠진 채 의미 없는 다툼을 이어가던 청년들은 밀린 월급을 포기한 채 공사장을 나와 트럭에 몸을 싣는다. 허망한 마음을 안고 트럭에 몸을 실은 청년들 사이로 술레이만의 지친 모습이 보인다. 내내 무기력한 얼굴로 동네를 돌아다니던 술레이만은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연인인 아다를 만나게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그들의 상황 또한 순탄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아다는 부모님의 강요로 동네에서 알아주는 재력가와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술레이만은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떠나버리고 만다. 아다는 말도 없이 떠난 술레이만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심란한 결혼식을 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신혼집에 화재가 발생하게 되고 뜻밖의 화재를 시작으로 영화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초반부만을 놓고 봤을 때 영화는 어딘가 익숙하게 본 듯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두 남녀가 부모님의 반대와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고 서로를 애달프게 그리워하다 끝내 재회하지 못하게 된다는, 조금은 전형적인 이야기를 가진 영화처럼 다가온다. 영화의 초반 템포를 그대로 유지하며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어쩌면 조금 지루한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예상하며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중반부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복시키며 그 전과는 전혀 다른 톤으로 영화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영화의 초반부는 잔잔하고 고요히 흐르고 있는 바다의 모습을 멀리서 담아낸 모습이라면 영화의 중반부부터는 보다 더 바닷속으로 적극적으로 다가가 파도가 만들어내는 크고 웅장한 바다의 모습을 담아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영화 안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으니 가능하면 영화를 다 본 후 읽어보기를 권장한다. 아다의 결혼식 날 발생한 화재사건으로 그동안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이사 경위가 영화 안에 등장하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내내 잔잔하게 흘러갔던 이야기 흐름은 이사 경위의 등장으로 그동안에 없던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이야기를 빠른 템포로 이끌어가는데 그전에 주된 이야기였던 술레이만과 아다의 사랑이야기에 화재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찾아가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이야기의 층을 훨씬 더 다채롭고 흥미롭게 쌓여가기 시작한다. 화재사건을 시작으로 마을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현상 역시 영화의 스릴러적 요소를 배가 시키는 데에 큰 몫을 차지한다. 배를 타고 떠났던 청년들을 아다와 함께 그리워하며 기다리던 마을 여자들이 하나 둘 해가 지면 기이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독감에 걸린 듯 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마을 여자들은 밤이 되자 혼이 사라진 눈을 한 채 밤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마을의 수많은 여자들이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찾아간 곳은 다름이 아니라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서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건축업자의 집이었다. 건축업자 집에 모여든 마을 여자들은 건축업자에게 배를 타고 떠난 청년들의 떼인 돈을 달라 요구한다. 마치 여자들의 몸에 배를 타고 떠난 청년들의 혼을 깃들어 있는 듯 행동을 하던 여자들은 돈을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집에 불을 지르고 유유히 사라진다.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화재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이사 경위 역시 피해 가지 못한다. 이사 경위는 화재사건을 조사하면서 계속해서 땀을 흘리며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듯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의 일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사 경위는 몸상태가 좋지 않은 거라 판단하며 병원을 찾아 휴식을 취해보지만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땀을 흘리며 쓰러지고 만다. 한편, 화재사건의 용의자로 술레이만이 거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다는 그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정말로 자신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설레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다에게 알 수 없는 번호로 연락이 오기 시작하고 연락하는 이가 술레이만일 거라 굳게 믿고 있던 아다는 그를 만나러 가려하지만 재력가 남편과 부모님의 방해로 찾아가지 못한다. 술레이만과 원치 않은 결혼 생활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아다는 두렵지만 홀로 서는 삶을 선택하게 되고 술레이만의 존재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아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버리고 만다.


영화 안에는 의미심장한 장치들이 꽤나 많이 존재한다. 특히나 영화의 비장함이 묻어나는 부분은 죽은 영혼이 깃드는 대상이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일이라 여겨졌던 마을 여자들이 불의에 맞서는 투쟁의 존재로 변모하게 된다. 밤이 되면 억눌러왔던 욕망을 쏟아내듯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마을 여자들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비록 죽은 청년들의 영혼이 깃든 모습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모습은 꽤나 통쾌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조금 더 생각할 거리는 많이 던져주는 인물은 마을 여자들 중 아다와 함께 영혼에 지배받지 않았던 디오르의 존재이다. 디오르는 아다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을 때마다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는 디오르는 마을 여자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 돈을 벌며 주체적인 삶을 사는 인물이다. 이처럼 영화는 극이 진행되면서 자신의 목소리와 모습을 찾게 되는 여성의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낸다. 조금씩 자신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과 스스로의 주체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여성 그리고 비로소 완전한 자신을 찾게 된 여성까지 감각적으로 여성의 삶을 담아낸 영화의 시선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잠에서 깬 아다는 밝게 빛나는 드넓은 바다와 디오르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곧 몸을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한다. 어떤 기억은 징조이다. 내가 누구인지 상기시켜주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보여준다. 미래를 가진 아다. 내가 아다이다.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정의 내린다.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만 했던 아다는 처음으로,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그 누구보다 욕망을 갖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을 선포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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