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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Nov 06. 2023

듣지 않는 사람, 말하지 않는 사람

고양이의 귀로 들어라

사위와 장인. 남의 집 아들, 남의 집 아빠에서 결혼으로 이어진 관계. 만나거나 헤어질 때 악수를 나누는 사이. 일 년에 적어도 네 번의 식사 자리에서 밥과 술을 나누는 그들이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뭐 하고 있길래 전화를 둘 다 안 받아?”


잠깐이면 끝날 용무라고 생각했던 삐사감 일행은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점심때가 다가오자 집에 남아있던 두 사람에게 연락을 했더랬다. 조금 늦는다고, 뭐라도 요기하고 계시라는 말을 전하려고 수차례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조금 느긋하게 둘러보고 차도 마시고 돌아가려던 계획은 연락이 닿지 않자 흐지부지 되었다. 티브이 소리가 너무 커서, 잠이 들어서, 핸드폰을 묵음으로 해둬서…. 온갖 상황을 떠올리다가 조금씩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는데 막상 거실에서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맥이 빠졌다.


장인의 과거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느라 방에서 핸드폰이 울리는 것도 몰랐던 사위는 이야기를 추려서 삐사감에게 전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해 들은 아빠의 과거사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생각해 보면 1930년대 후반 태생이니 아주 어려서는 식민지배와 해방을, 열 살 남짓했을 때는 한국전쟁도 겪었을 테다. 식민지, 해방, 전쟁은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었으니 그 시기를 살아온 아빠도 크고 작은 이야기를 품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평소에 아빠는 자식들 앞에서 전쟁세대가 흔히 털어놓곤 하는 그 시절 고생을 말로 옮긴 적이 없었다.


옛날 옛적 다이얼을 돌려 전화를 걸던 시절 동그란 다이얼의 정중앙에는 ‘용건만 간단히’라는 표어? 가 있었다. 아빠는 ‘용건만 간단히’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통화시작과 동시에 사위와 손녀의 안부를 묻고 더우니까 혹은 추우니까 몸조심하라는 계절인사를 전하면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통화가 끝났다. 가끔 주고받은 카톡으로는 오히려 긴 문장을 전달하지만 전화는 항상 통화기록 **초를 기록하는 것을 보면 습관이란 게 무섭게 느껴졌다. 전화는 중요하고 급한 용건을 간단하게, 편지(=카톡)는 그나마 길고 세세한 내용의 문장으로 채운다는 습관이 아직도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예전 집에 있던 전화기와 흡사하다.


부녀간의 대화도 전화통화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왔구나, 많이 좀 먹어라, 옷 보기 좋다 등이 신변에 대한 가장 깊숙한 대화였다. 가끔 아빠는 정치 사안을 거론하며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는 말을 건넸지만 결코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이미 짐작하고 확실한 대답을 원하지는 않는 듯했다. 서로 상처 입을 것은 피하고 집요하게 상대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


짧은 대화의 귀재라고 생각했던 아빠가 사위에게 꽤 긴 시간을 들여 전한 말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모처에서 오랜 세월 살고 있었던 조부와 아빠는 해방 이후 강원도로 이주했다. 이전 거주지에서 사기를 당해 재산을 정리하고 강원도에 살고 있던 작은할아버지 곁으로 근거지를 옮긴 것이다. 해방과 한국전쟁 사이, 혼란한 그 시절 작은할아버지는 공산 사상에 빠졌던 인물이었다. 그의 집 근처에는 지하벙커가 있었고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작은할아버지 가족이 북으로 떠난 후 발견된 지하벙커 구조물은 남은 가족에겐 불행과 재앙이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던 대로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북으로 넘어간 친척 집에 버젓이 존재했던 지하 벙커는 남쪽에 남아 있던 가족들의 사상을 의심할 만한 증거가 되었다. 하지만 조부모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북측을 지지하지 않았을뿐더러 작은할아버지의 사상적 성향도 전혀 알지 못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웃의 증언으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반공이 맹위를 떨치던 동안 직장에서는 신원조회 대상이 되었고 일상적인 감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한다.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아빠의 보수성은 생계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삐사감은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야간 고등학교를 겨우 나와서 대학 진학을 반대하던 부모의 지원 없이 얻어낸 교직은 소중한 밥줄이자 생애 최초의 커다란 성취였으리라. 60년대 반공의 시대, 어렵게 시작한 교직을 자칫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의 사상경향으로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항상 피곤하고 지쳐있지는 않았을지 헤아려보게 되었다.




아빠와 딸 사이에 진정한 만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나면 겨우 안부를 묻고 겉도는 뻔한 말을 몇 마디 의례적으로 나누는 것으로 족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후회로 남은 과거의 일이 무엇인지, 살면서 힘든 순간이 언제였는지, 요즘 가장 즐거운 일은 무엇인지……

거창하고 어려운 정치 이야기에 핏대 세우고 나라 걱정 경제 걱정을 그토록 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충분히 나눌 기회를 좀처럼 갖지 않았다. 삐사감은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보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화에 미숙한 부녀의 마음이 제대로 만나는 일이 있을까?


삐사감은 장인이 신나게 풀어낸, 좀처럼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듣고 전해주던 남의 자식=사위가 부러웠다. 자식도 아닌 그에게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빠는 가족 내에서는 들어줄 상대를 찾지 못했던 것일까? 이유를 불문하고 늦게나마 친절한 리스너가 되어 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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