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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May 03. 2024

그래도 네 개의 자격증은 남았습니다(?)

새로운 이상


아직 오십대로 접어들기 직전, 그러니깐 40대 끝자락에는 서류를 제출하면 면접까지 진행되는 경우도 많았다. 원서를 넣으면서 근무지를 확인하고 교통편이나 입지 등을 살폈다. 매번 냉담한 반응에 실망하면서도 매끼 식사를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개처럼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설레발을 치며 기대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면접임에도 최종에서 선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결국은 나이가 걸림돌로 느껴졌다. 나이의 앞자리가 4에서 5로 바뀌자 조급함이 극도에 달했다. 이쪽 방면에서 아무런 경력도 쌓지 못한 자신이 초라해졌다. 고지식하게 수업 출석률을 100퍼센트로 만들고 과제물을 제출하고 시험에 응시해서 과하게 좋은 점수로 학점을 저축했던 게 오히려 앞뒤 재지 못한 미련한 짓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상상 그 이상의 거대한 기계가 품고 있는 수많은 나사 중에 하나로 사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안에서 있는지 없는지 인식되지 않는 존재로 하루하루를 깎아 먹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회사노예를 그만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이제는 다시 꿰차고 들어가고 싶어진 것이다. 작고 초라한 나사라도 다시 되지 못해 안달이 났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라 더 집착이 생겼다.   


거의 20년 전 다니던 회사에서 신입을 충원하기 위한 공고를 낸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남자가 지원서를 보내왔고 그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주로 결재만 하고 실질적인 업무에 가담하지 않았던 본사에서 파견된 고문을 제외하면 회사 구성원 중에 지원자보다 연장자는 없었다. 신입을 구하는 전형에 이제 곧 50을 바라보는 사람이 지원하자 희롱으로 느껴졌다. 그때는 반 장난인가 싶었다. 그 사람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었다. 다른 이력이나 경력을 살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의 서류를 제외했던 걸 보면 나이를 처음부터 걸림돌로 간주했던 것 같다. 그의 절박함을 무시한 것은 아닐까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반응이 보통의 것이라면 이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한다면 5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되고 싶으신가요? 어떤 일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아니더라도 막연한 것이라도 말해주세요.”  

    

최근 면접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답변은 술술 튀어나왔다. 지원했던 기관은 방과 후에도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놀며 학습하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부모의 육아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출산과 육아를 이유로 자기 일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는 당사자로서 기관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 시기를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다가 꺾인 ‘꿈과 목표’는 이미 너무 희미해져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과거와 좀처럼 달라지지 않은 육아 환경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방황하지 않게 하는 것, 아이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안정적인 보호자와 생활할 수 있는 기초적인 안전망으로 기능하는 것이 기관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이러한 기관은 출생률을 놓고 경쟁적으로 내놓는 일시적인 지원금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당신들은 지금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아이가 만 2.5세가 되었을 때, 재취업했다. 살던 동네는 오래전부터 터줏대감이었던 작고 영세한 공장들과 새로 지은 아파트가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6차선 도로에 비해 인도는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로 차량은 무섭게 달려갔고 소음으로 대화는 불가했던 그 길이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다. 6차선 대로변 바로 안쪽 골목에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정한 이유는 지하철역에서 집 사이에 어린이집이 있다는 이유 단지 하나였다.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재빨리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곳, 어린이집에서 직장인처럼 하루 10시간 넘게 머물러 있는 아이를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들었다.

     

역 주변 낡은 건물 2층에 자리한 당시의 어린이집을 뭐라 평가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탁아시설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취업 결정과 함께 이사도 하는 통에 여기저기 가볼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원아 모집이 끝난 상태였고 역에서 집을 지나 5분은 더 걸어가야 했다. 게다가 운영시간도 짧아 퇴근 전에 데리러 가야 했다.


가까스로 선택한 어린이집은 꽤 많은 계단을 올라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커다란 공간과 몇 개의 교실로 구획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 계단을 올라가는 것조차 버거워했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불평한 적은 없었다. 뭐든지 잘 순응하는 아이였다.

     

거기에서 3년여를 지냈다. 과하게 아이들을 혹사시키며 준비했던 재롱잔치를 두어 번 했고 때마다 갯벌 체험과 수영장, 캠핑, 소풍을 다녀왔다. 아이는 어린이집과 같은 건물에 있던 유치원까지 이어 다니게 되었고 한글을 어느샌가 깨쳤다. 가끔 아파서 곤란했고 아침마다 깨워 데리고 나가는 일도 고단했다. 일이 끝나자마자 저녁을 준비해서 먹고 씻고 치우는 일상을 엄마만큼 힘들어하지는 않았다. 어느새 직장인이 관성적으로 출근하듯이 아이도 유치원은 가야만 하는 곳,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이 분야에서 재취업에 성공한다면 저와 같이 육아를 이유로 일을 그만두는 양육자가 없도록 조력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5년 후에는 면접관들과 같은 형태의 사회사업을 직접 운영하는 일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대답하면서 마무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급조한 것이지만 진심을 담은 답변이었다. 이번 면접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심과 솔직으로 밀고 나갔다. 면접에서 그런 식의 답변은 안된다고, 면접용 답변이 따로 있다고 아이한테 그렇게나 충고질을 했지만, 실전은 다르더라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지금처럼 동네 가까운 곳에 돌봄의 공간이 있었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혼자 감당했던 짐을 나눠줄 기관이 있었다면 당시에 하던 일은 좀 더 전문성과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지금 다시 제2의 인생을 준비하면서 공부하고 젊은 면접관과 늙은 응시자 사이의 긴장감을 이겨내고자 전전긍긍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사뭇 안타깝고 꼴사나운 면접의 시간도 반복되는 일상으로 아득하게 흐려졌지만, 면접관이 던진 마지막 묵직한 질문은 새로운 상상(이상)을 품게 만들기도 했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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