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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Aug 08. 2023

내가 떠나보낸 식물

<이웃집 식물상담소, 신혜우>

한국에서 서양란으로 판매되는 난초는 사실 대부분 중국 남부지역이나 동남아가 원산지인 열대 난초다. (중략) 우리나라에 들어와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외국식물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서식처에서 멋지게 자라는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원래 고향의 따뜻한 환경 아래였다면 커다랗게 자랐을 텐데, 화분에서 성장이 지연된 채 지내는 모습도 슬프다. 식물상담소를 하면서 베란다에서 키우는 식물이 예전만큼 잘 자라지 않는다는 상담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예전에도 잘 자라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말한다.

신혜우, 이웃집 식물상담소, p.23


  2020년 3월 말, 남들처럼 양재동 화훼단지에 가보았다. 드넓은 화훼시장은 인파로 가득해서 차를 세울 공간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단지라는 말이 어울리게 광활한 부지는 이름 모를 식물로 가득했다. 몇 시간을 헤매도 쉽게 결정에 이르지 못한 채 망설이다가 몇 가지 원칙에 부합하는 식물을 겨우 골라 담았다. 초보자가 키우기 쉬운 식물일 것, 아주 작은 소품보다는 한 단계 크고 다년초일 것. 그래서 이 날 새로이 집에 들인 식물은 애니시다와 바질트리이다. 애니시다는 노란 꽃이 무성해지는 모습을, 바질트리는 웃자란 순을 잘라먹는 날을 상상하며 다리사이에 앉혀 고이 모셔왔다.


  3년 여가 지난 현재 이 아이들은 모두 내 곁에 없다. 애니시다는 꽤 크게 자라 베란다는 노란 꽃잎으로 가득했다. 이사로 바뀐 장소가 문제였는지 어느 날부터 노란 꽃대가 말라 전부 우수수 떨어졌다. 이참에 가지치기를 해서 외목대로 만들어 키워보겠다는 무모한 생각으로 검색한 끝에 가위를 손에 들었다. 굵은 외목대식물로 자랄 것을 상상하면서 잔가지를 잘라내는 손길은 과감해졌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새순은 나오지 않고 그냥 화분에 막대기 하나를 꽂은 형상이 되었다. 꽤 긴 시간 화분 속에 꽂아두고 노란 꽃이 무성하던 시절이 떠올리며 물을 조금씩 주면서 회생을 기다렸지만, 결국 외목대는 나무젓가락처럼 두 동강으로 꺾여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바질트리는 가장 작은 화분에서 시작해서 그다음 해에는 처음 실패를 만회하고자 그보다는 조금 큰 중품을 선택했다. 바질트리는 애니시다보다도 더 참혹하게 떠나보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 식물 모두 살충제를 곁에 두고 보호해야 하는 식물이었다. 화훼단지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튼실하게 식물상태를 유지하는가 했는데 살충제효과였나? 그럼 바질을 어떻게 식용으로 따먹으라는 건지? 먹을 기회는 고사하고 여린 초록잎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누런 잎으로 변하고도 향기는 은은하게 남아 쉽게 버릴 수도 없었다.


  애니시다와 바질트리로 끝났으면 좋았을 어리석은 짓을 그다음 해 봄이 되면 뭔가에 감염된 것처럼 반복하였다. 세상에는 너무나 새롭고 아름다운 식물이 많고 매번 매혹되었다. 재작년에는 남편회사에서 화훼농가소득증진과 사원의 복지를 위한 화분 나눔 행사를 했다. 봄철 내내 처음 보는 잎과 꽃을 가진 화분을 기다리는 저녁이 즐거웠다. 족히 10개는 되는 식물을 분갈이하고 식물마다 적합하다는 장소에 놓아주고 인공바람을 제공했지만, 중품으로 자란 서너 개를 빼고 두어 개는 처음 모습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위기상태이다. 그중 아이비는 2년여를 함께 했지만 지금은 세 개의 이쑤시개 같은 모양으로 화분에 남았다.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한 식물은 킹벤자민과 재스민, 인삼펜더로 추정되는 나무이다. 동생이 개업하면서 받은 식물을 우리 집으로 옮기고 킹벤자민과 인삼펜더는 다행히 10여 년을 함께 하고 있다. 재스민나무는 꽤 오랫동안 보라색 꽃과 향기로 베란다를 화려하게 만들었지만 어느 날인가 잎과 줄기가 다 말라버렸다. 식물은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끝!이라고 작별을 고하면 웬만해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위기를 포착하고 흙과 분을 갈아주고 빛의 위치도 바꾸고 자꾸만 쳐다보면서 말을 건네지만 화분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베란다 구석에 두고 말라버린 뿌리와 가지에서 잎이 솟아나는 요행수를 기대하며 간헐적으로 물을 주었다. 미련한 식집사의 헛된 뒷북치기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대프리카, 서베리아 같은 말이 등장할 정도로 날이 갈수록 극한의 추위와 더위가 찾아온다. 겨울과 여름이 극명한 온도차를 보이면서 외부에서 문제없던 식물들은 겨울이 되면 추위를 견디지 못해 동사한다. 주로 개업축하로 받았을 거대화분이 좁은 가게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바깥에서 잎이 얼어 고동색으로 변한채 흉물스럽게 방치된 것이다. 개업축하식물로 인기가 좋거나 멋진 잎을 볼 생각으로 들이는 식물들은 모두 서베리아 한국에서는 월동이 불가하다. 여름 내내 가게 앞에서 잎이 무성해지던 식물들이 늦가을이 지나도록 가게 앞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러다 어느 날 진갈색으로 변색한 잎을 그대로 달고 동사한 식물을 마주하게 될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모든 잎이 떨어지고 상록수만이 겨우 버티는 겨울에도 집안에서 푸른 잎을 본다는 것은, 주변에서 흔히 보이지 않는 기기묘묘한 식물을 곁에 둔다는 것은 많은 수고가 따르는 일이다. 식집사로서는 해야 할 일은 채광, 통풍, 물 주기를 기본으로 살충, 비료주기, 영양제공급, 분갈이 정도로 간단하다지만, 적당한 시기에 적당량을 공급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에 둘러싸인 공간에 사는 도시인이라면 초록식물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길만하다. 재테크나 인테리어의 대유행이라는 흐름에 편승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회색벽 한 귀퉁이를 작은 꽃이나 진귀한 잎사귀를 가진 식물로 장식하는 여유를 갖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종종 숲 속 전원주택에서 사는 사람들도 집안에 관엽수를 들이는 것을 보면 주변환경의 결핍과 무관하게 ‘자기만의 무엇’을 인간은 욕망하는 것 같다. 만인의 식물이 아니라 내 식물을 찾아 곁에 두고, 내 눈앞에서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소유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일까?


  내가 식물을 곁에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같은 여름에는 손가락을 찔러 넣어 화분의 흙상태를 확인하고 작은 화분들은 욕실로 옮겨 물을 주고 선풍기를 틀어 인공통풍에 신경 쓰다 보면 아침부터 지치고 만다. 매년 새흙으로 분갈이를 해야 하고 묵은 흙은 폐기물처리해야 하는 고단한 과정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명이 다한 식물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빈 화분을 켜켜이 쌓아 올리면서 허무해지는 감정마저도 이겨내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식물들이 사는 집안 환경은 그들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다. 인간이 가공한 온갖 장치들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집안을 식물친화적 환경으로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인간은 기괴하고 굴절된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닐지. 식물을 위해 땀을 흘리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 같지만 나의 외로움과 만족을 위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으로 뒤범벅된 자연친화적인 행위이랄까?  




  인형이나 빈 화분 같은 무생명의 물건이라도 버려진 모습은 쓸쓸하다. 하물며 살아서 꽃을 피우고 꽃향기를 풍기던, 가지마다 새순을 틔우며 맹렬한 생명력을 보이던 식물이 폐기물로 처분되는 모습은 무상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 이상 식물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지금 곁에 있는 식물에 최선을 다하자고. 그래도... 지금 앉아 있는 카페에서 핀 조명을 받은 떡갈나무의 커다란 잎이나 어두운 실내에서도 새순이 돋아나는 고무나무는 이 공간에 너무나도 찰떡이라고 느껴버린다. 어느새 먼 지방에서 온 흔하지 않은 식물에 익숙해져 버렸고 그들이 있는 것이 당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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