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를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터미네이터>를 꼽을 정도로 이 영화는 나에게 참 많은 추억이 패키지로 묶여 있다. 영화가 속편이 나오고 또 속편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도 이 영화로 처음 알았고(어릴 때 다른 영화엔 관심이 없었음. 홍콩 영화도 본 적이 없는...)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듯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이어지는 속편을 보면서 세계관과 이야기가 발전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그런 나를 지켜보는 재미가 좋았다.
오늘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를 보면서 내내 한 생각은 계속 보고 싶다. 또 보고 싶다였다. 전에 <원더우먼>을 봤을 때도 그랬다. 키 큰 근육질의 여성이 애교를 부리지도 않고 자기 비하를 하지도 않으면서 세상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달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무엇이든 미워하며 차츰 시간을 들여 누군가를 친구로 정할지 선택하는 이야기를 난 좀처럼 접하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그냥 이 이야기가 내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 좋았다.
어떤 공주가 어떤 기사에 의해 구원되고 또 어떤 하층민은 어떤 계시에 의해 어떤 영웅을 낳는 영광을 누리고 어떤 예쁜 여자는 어떤 예쁜 여자를 질투해서 죽이고 또 어떤 예쁜 여자는 어떤 중요한 남자를 위해 죽고... 나의 평생은 그런 이야기들과의 싸움이었다. 동화와 소설 속에서 어떤 남자와의 로맨스가 나오지 않는데 존재하는 여성은 내가 태어나 나이 먹는 시간 동안에는, 없었다.
어떤 겨울 10살이 되었는지 넘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집에서 언니랑 이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봤다. 정사각형의 볼록한 뚱뚱이 텔레비전. 그때 심장이 두근거리는 공포와 재미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때 내 뇌리에 남은 소원이 기억난다. 나에게도 저런 남자가 나타나면 좋겠다. 사라 코너는 좋겠다. 저런 사람이 사랑한 여자. 여러 사람이 구해주니까 여러 사람이 사랑해 주니까 좋겠다.
몇 년 뒤에 극장에 터미네이터 2가 걸렸다. 턱걸이를 하는 여자. 웃지 않는 여자. 미친 여자. 사라 코너가 변했다. 내 인생에 안 웃는 여자가 저렇게 근육이 많은 여자가 사랑받으려는 욕망이 전혀 없는 여자가 움직이고 말을 하는 것은 처음 봤다. 심지어 그녀는 자기 아들을 아끼는 방법도 전혀 달랐다. 내 눈엔 틀린 방법으로 보였다. 내 친구는 매일 학교에서 나에게 자기는 터미너이터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고 난 정신 차리라고 했다. 그때도 난 여전히 이루지 못할 꿈은 애초에 거세해 버리는 소심쟁이였고 터미네이터 2를 보고서도 내 마음에 남은 것은 미소년 존 코너였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잘 생겼을까. 그게 내 관심사였다. 사춘기가 아직 오지도 않았던 나이.
이렇게 나이를 먹고 그 사이 세상에는 그리고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는 많은 일이 있었고 연애도 결혼도 안 하는 여자들이 나타났고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신의 자리를 대신했고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구원자는 세상에 없다는 것과 수태고지를 하던 천사의 방문은 폭력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버린 내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책도 없이 그 물결에 떠밀려 불안 그 자체인 삶을 살면서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를 보러 갔다.
사라 코너는 할머니가 되었다. 세상을 구원해 낸 여성은 남편도 아들도 없다. 그래도 허리가 꼿꼿하고 전략을 세울 줄 안다. 옳다고 여긴 삶을 살았으며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지만 손에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는 분노가 그녀의 주름에 새겨져 있었다. 고립된 그녀에게 '존을 위해'라는 문자는 복음이고 미션이다. 어떻게 안 움직일 수 있을까. 세월이 변해서 자신을 미래를 구원할 마리아로 여겨주는 이들조차 완전히 지워졌고 이제는 여자가 곧 존이 된 세상이라는 것을 할머니가 된 사라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세상을 구원할 남자를 낳을 여자를 구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야말로 할머니가 된 사라에게 가장 큰 보상이었을 것이라는 걸 나는 믿는다. 사라는 이제 자궁이 아닌 사람을 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역할은 존재 자체다. 사랑받지 않아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미션을 위해 고독을 선택하는 역사를 쓰는 사람. 사라 코너. 사라는 살아남아 또 다른 미래와 연대한다.
세상이 나를 배신해서 만약에 이렇게까지 많은 것에서 배제된 나에게 또다시 마리아의 서사를 내놓았다면 나는 너무 화가 났을 것 같다.
이야기는 살아남아야 이야기가 된다. 이제 구비전승의 시대는 갔고 기록의 시대도 끝나간다. 이제는 살아남은 이야기가 영상화되고 선택된 영상만 재탄생의 기회를 얻는다. 한 남자 로봇이 한 자궁을 죽이러 오고 한 남성이 사랑을 위해 미래를 지키고 미래를 지키며 사랑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서사로 살아남는 중이다. 나에게 여전히 가장 재밌는 영화는 <터미네이터 2>이고 <다크 페이트>의 이야기는 아직 어설프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이제 태어났고 앞으로 정말 많은 연습을 거듭할 것이다. 지겨울 정도로 신물이 날 정도로 이렇게 저렇게 별별 연습을 다 하겠지.
지금 내 나이인 누군가는 이 이야기부터 시작인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벅찬 기분을 느끼게 한다.
우리들의 이야기 흐름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누군가의 영화 비평을 읽었다. 그들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야기가 나의 삶을 살짝 비껴가게 했듯 지금 쏟아져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많은 것을 조금씩 비틀어 갈 것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것이고 그러니 그 한 사람만 잡으면 된다는 이야기는 이제 끝났다. 이제 메시아의 서사는 먹히지 않는 시대가 왔다. 누굴 구하든 세상은 잘못된 선택과 옳은 선택을 할 것이고 모든 쪽의 전면에 여성이 있을 것이다. 자궁이 아닌 여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