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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한라산 그리고 까마귀

혼자 여행기 1912 제주여행기2

by 호담

아이고 저런...


15일 밤 나의 첫 한라산 등반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가는 길, 버스 타는 시간, 빠른 환승 근처 맛집, 준비물, 나애게 없는 것(다 없다.)내가 도전하는 코스는 한라산 등반 중 가장 쉽다는 영실코스. 일단 중문 관광단지 로터리에서 하차 후 버스 환승. 영실 제1 주차장에서 하차 거기서 항시 대기 중이라는 제2 주차장 가는 택시를 타고 제2 주차장에 내려서 거기부터 올라가면 됨. 물론 걸어가도 되지만 그냥 도로라 산 타는 느낌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왕복 모두 영실 코스로 결정. 돌아올 때 추천 메뉴는 중문 로터리의 '은희네 해장국' 맛이 기가 막히다며 두분이 칭찬을 막 펼치는데 안타깝게도 난 육류와 조류를 못 먹는다. 내가 해장국을 못 먹는다는 소식에 게하 호스트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장탄식을 하시는지 그게 너무 웃겨서 한참 웃었다. 정말 얼마나 맛있길래!

겨울여행 짐가방

겨울 여행은 옷부피가 커서 짐 싸기가 정말 힘들다. 오기 전에 곰씨비씨 호스트님이 산행을 추천했는데 아이젠이니 등산화니 정말 아무 것도 없는데다가 원래 시골로 혼자 여행가면 어디 안가고 동네만 돌아다니기 때문에 옷도 안 싸왔다. 올 때 입고 온 옷, 잘 때 입을 옷 겸 실내복, 혹시 몰라서 면 원피스 하나 이게 다였다.


"자기야 다른 옷은?"

"저 내일 이거 입고 가려고 했는데요."


내가 입은 기모 반 팔을 보더니 결국 본인 옷 다 들고 나와서 챙겨주심. 일단 기온이 영상 18도 예상되기 때문에 아이젠과 등산화 패스, 추웠다가 더울거니까 안에 면 반팔 그 위에 티셔츠 그 위에 겨울 바람막이와 얇은 패딩으로 여러겹 겹쳐 입고 하나씩 벗을 수 있게 준비. 가방, 간식, 입과 목 바람막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빌림... 그렇게 가방 챙기고 타로 풀이도 하고 여행기도 마무리하고 어쩌고 하니 새벽이 되었고 여행 첫 날이라 그런지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안 왔다. 새벽 2시. 3시. 4시. 5시... 그렇게 아침이 돼 버렸다. 망했다.


새벽 산행

곰비가 시내로 학교를 다녀서 새벽에 등교 하는데 그 차에 끼어서 나도 아침에 가기로 했다. 새벽 6시 30분. 산으로 향하는 동안 하늘이 점점 여러 색을 띠며 밝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영실도착. 이제 나 혼자다. 그리고 정말 나 혼자였다. 당황. 분명히 여기 오면 일단 택시들이 쭉 기다리고 있다고 했는데 주차장이 텅텅 비었다. 그리고 새벽이라 산에 오니 춥다. 약간 두꺼운 레깅스 하나 입었는데 한기가 든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옴. 과너리 사무실 현관 안쪽에서 기다리다가 아까 어딘가에서 와서 산으로 올라간 택시가 혹시 내려올까하고 주차장으로 다시 나왔다. 아! 택시가 내려온다. 날 봤을 줄 알았는데 그냥 내려가려고 한다. 택시! 여기요!!! 기사님이 난감해하며 나를 본다. 역시 이럴 땐 초보자급의 행색이 먹힌다. 스틱도 등산화도 등산복도 없는 순수 그 자체인 내 입성을 보더니 약간 망했단 표정으로 태워주셨다. 원래 여기 택시가 아니라서 산에서 내려가려는 줄 알고 섰는데 다시 올라가자고 해서 고민하셨다고 한다. 아무튼 열심히 질문을 했더니 많은 정보를 안겨 주고 두당 5천원 시장 룰대로만 받고 떠나셨다. 아... 등산객이 많을 줄 알았는데 나 혼자라니 당황스럽다. 그래도 밤은 아닌게 어디야. 등산 시작.


안 힘들다고 했잖아요

초반에 계속 가파른 계단 병풍바위 오르기까지의 구간은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왔을까 싶은, 끊임없이 숨을 몰아쉬게 되는 난코스였다.(나한텐 히말라야!) 아직 아침이라 추워서 빨리 몸을 덥히려고 서둘러 올라갔다. 그리고 조금씩 펼쳐지는 풍경들. 해발 1500 정도에서 병풍 바위가 보이고 해가 서서히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분명히 호스트님은 여기 너무너무 쉬운 코스라고 했는데 낚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딱 그때쯤 잘 올라가고 있냐며 전화가 왔다. 힘드네요. 이어지는 웃음. 이제 조금만 더가면 접신하게 되는 풍경이 나온단다. 아 또 낚이는 건가. 기꺼이 미끼를 물고 다시 올라간다. 정말 끝도 없는 계단들...


통곡할 만한 자리

이후 펼쳐진 경관이다. 비수기의 아침 한라산. 아무도 없고 정말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여러 풍경이 겹쳐진 이곳에 나 혼자 있었다. 오르마길이 끝나고 평지가 펼쳐질 줄이야. 산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무도 없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박지원이 통곡할 만한 자리라고 했던 요동의 풍경이 이랬을까... 그나저나 그 험한 여행을 하며 아니 여행이 아니지 사절단이 갑자기 바뀐 행선지에 도착 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던 급박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글을 써댄 박지원이 새삼 더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여행와서 계속 기록을 하는 건 어떤 것을 포기하는 행위라서 쉽지 않다. 잠을 포기하고 혼자만의 빈둥댐이나 경치나 어떤 대화를 포기해야 한다. 딱히 대단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식 같이 또는 세수하기나 화장 지우기 같이 타협이 없는 영역으로 붙박아 둬야만 쓸 수 있다. 박지원은 참 잘 썼던데 하긴 당시에는 이 따위가 글이냐 했을 문체다. 사실의 기록을 나열하다가 어쩌다 나오는 한두줄의 사색을 적자고 새벽 4시에 깨어 이러고 있는 나도 웃기다. 하지만 산행의 순간을 기록하려고 걷는 내내 뭘 쓸까 고민했었다. 그냥 지나가면 휘발되고 말 것이다. 이 순간과 감각과 기억이...

바다에는 갈메기 산에는?


윗새오름 대피소에서 귤을 까먹었다. 마지막 한 조각이 남았을 때 까마귀 한마리가 옆에 앉았다. 위협적으로 가까이 오진 않는데 난 까마귀가 그렇게 예쁘게 생긴 지 처음 알았다. 반질한 윤기나는 깃털과 푸른 빛이 나는 당당한 부리. 아무 것도 안 주면 재촉하면서 계속 뭐라고 한다. 귤조각을 건냈더니 그 자리에서 먹는다. 약간 고양이 같은 느낌이었다. 햇살이 따뜻했고 5명 정도의 등산객이 각각 흩어져 여유를 즐기다 다시 자기 갈 길을 갔다. 난 다시 영실 코스로... 이 풍광을 다시 볼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천천히 걷다가 메시지를 주고 받다가 사진을 찍었다가... 조금씩 등산객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아침과는 다르게 좀더 쨍해진 햇빛 그리고 점점 더워지기 시작. 새벽에 오길 잘 했다. 내가 본 풍경을 그들은 모르겠지. 안 됐다. 그렇게 난 만족스럽게 천천히 하산했다. 마지막 계단이 역시 너무 가팔랐다. 지금 뒷종아리가 너무 쑤신다

아침산

이제 사람도 많으니 주차장에 택시가 있을거라 확신했는데 없다. 고민 살짝했는데 날도 좋고 시간도 많으니 걷기로 했다. 이때 걸은ㅓ이 길이 그날의 여운과 기분을 확실히 마무리하며 감싸주는 역할을 했다. 나무 사이로 쪼이는 햇살 잘 깔린나무 데크, 간간이 내려가는 차량들... 천천히 오래 걸어서 제1주차장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렸다. 20분 동안 시간이 어떻게 갔는 줄도 모르겠다. 그렇게 잠 한 숨 안자고 새벽 강행을 한 한라산 등반을 마쳤다.


기사님 저 좀 잘게요

그 다음에 점심 먹으로 중문 덕성원 거기 게짬뽕이 그렇게 맛있다고 강력 추천을 받아 미션처럼 넘겨받은 메뉴. 열심히 걸어서 겨우 찾았는데 월요일 휴업... 아 그래 오늘 이런 날이구나? 뭐가 안 되도 안 되는 날. 그렇다면 자신 있지!! 이 때 내 상태가 딱 거지꼴이었는데 점점 근육이 당겨오고 잠이 오고 피곤하기 시작했다. 여행가서 계획대로 안 되는거야 일상이지 바로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보말톳 칼국수를 대충 먹고 탄산 온천 가는 버스를 탔다. 타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탄산온천까지 40분.

집으로 가는 길

말로만 듣던 제주도 산방산 탄산 온천 그냥 목욕탕이군 하면서 없는 도구로 최선을 다해 탄산온천욕을 즐기고 나왔는데 와... 거울보고 깜짝 놀랐다. 진짜로 거짓말 안 보태고 얼굴에서 빛이 났다. 정말 자연의 힘은 위대하구나. 위대함에 힘입어 다 귀찮은 나는 스킨만 바르고 머리도 대충 물기만 걷어내고 다시 후드 바람 막이로 몸을 가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서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버스 한 번만 환승하면 대평리 바로 가는 버스가 오는데 막상 화순리에서 환승 버스 기다리는데 안 온다... 버스 운행 정보가 아예 안 뜸. 매번 당하면서 매번 까먹는다. 여긴 서울이 아닌데... 눈이 자꾸 감겨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제주도는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 콜번호 알아낼 머리가 안 돌아간다. 결국 곰씨비씨 호스트님이 카멜리아에서 업무보시다가 나 데리러 오심. 집에 오자마자 이불로 쏙 들어가서 기절하듯 두 시간 잤다. 세상에 둘도 없는 꿀잠이었다.

곰씨비씨 고양이들 만질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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