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는 너무 실망스럽지만 워낙 원작의 설정이 상징적이어서 나에게 어떤 장면들을 떠올리고 객관화하게 만드는 역할은 충분히 해줬다.
한국 영화 <조제> 속의 남주는 너무 한국적이어서 웃음이 났다. 이유 없이 빠져들고 이유 없이 같이 있고 - 행복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 그래서 이유 없이 떠난다. 조제가 가도 된다고 했다고 조제가 허락했다고 믿고 있으려나?
'난 하나도 안 불편한데 왜 내가 불편할 거라고 생각해? 기분 나빠.' '가, 불편해. 오지 말라고 했잖아.'
멀쩡하고 아담한 나의 집을 놓고 볼 때마다 '이사 안 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가 쉬긴 좋은데 옛날 집 보는 느낌이라면서, 영화 속의 남주는 말한다. 춥지 않아? 텔레비전 나와? 휴대폰 없어? 자기에게 있는 것을 기준으로 상대의 일상을 무참히 무너뜨리고 비루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의 애정을 받는 기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맙네. 쓰레기를 가져다줘서.'
의도가 뭐였든 필요 없으니까 주는 스팸과 김을 받으며 조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공격적으로 비틀릴 수밖에 없다. 자긴 집에 가져가도 안 먹는다며 부담 갖지 말라고 굳이 하는 기분 나쁜 말들에 섞인 다정함... 조제에게 폭풍우를 일으키고도 천진한 저 우둔함.
조제는 무엇이 잘못인지 무엇이 기분 나쁜지 다 알지만 선택권이 없다. 그녀에게 주어진 현실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리고 난 조제에게 주어진 장애가 단지 상징일 뿐 조제형 인물들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인지하며 원작을 대해 왔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절실한 외로움을 품고 있는, 사실은 독립적이고 식물 같은 인간 유형. 그래서 주체적으로 갇혀 있고 싶어 하는 사람.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까다로운 사람일 뿐이다. 가슴속에 호랑이와 물고기가 있는 사람.
한국 영화 <조제>에서 남주는 그저 신경이 쓰인다는 이유로 움직이고 그 신경 쓰이는 것에 일일이 반응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될지는 하나도 계산할 줄 모르는 천치 바보가 조제 같은 여인에게 다가가고 망가진 휠체어 하나 고쳐주지 못하면서 일일이 연민을 느끼고 표현을 해서 기어이 조제에게 침투하는 이야기가 만든 사람에겐 무슨 의미였을까? 적어도 같이 있는 동안 행복하게라도 그려졌으면 좋았을 텐데 사랑에 빠져 행복한 장면 하나 없이 저렇게 억지로 강하게 억지로 심오하게 제한하는 게 너무 숨 막혔다.
사랑 얘기는 사랑 얘기여야 하는데 사랑의 환희가 전혀 없다.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조제들이 어떻게 느낄지 생각은 하고 만들었나. 불쌍한데 예뻐서 잠시 같이 있었다는 것인가. 나중에 운전을 하니까 성장했다고 우기는 건가.
원작의 조제는 저렇게 계속 우울하고 심각하지 않았다. 오기로라도 자기 자존심을 지켰고 짧은 시간일 것을 알아서 끝까지 원하는 걸 우기고 요구해줬다. 억지로 성숙한 척하지 않고 인간답게 거친 것 그게 조제의 강인함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리는 동안 설레었고 함께 있는 동안 행복했다. 멀어지게 된 이유도 명확했고 납득의 시간도 있었다. 햇살 가득한 날 아무렇지 않게 추억의 책을 건네며 안녕하고 남주도 가뿐하게 나가는 역할을 다하고서야 서로가 안 보이는 곳에서야 무너지며 터뜨렸던 울음을 저렇게 조제 옆에서 질질 짜는 모습으로 바꿔버리다니...
자기감정에 진심일 수 있었던 한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남자의 이해할 수 없는 서성임으로 추락시킨 영화 <조제>. 어쩌면 너무나 정확한 한국 젊은 남성의 자화상이 그려진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