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TV에서 한 번 언뜻 본 기억이 나고 유일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피아노 연주 장면이었다. 그럴 만했다. 그 옛날의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겠다.
필이 성장해 가면서 사랑을 얻는 과정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치고 누군가는 아프다는 걸 수없이 많은 날을 낭비하고서야 아는 필. 사랑받는 존재의 가치를 만들지 않고서 사랑을 얻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게 된 필.
사람이 사람이 되는 조건에는 관계와 사회에 대한 인식과 감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어릴 땐 잘 몰랐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모르는 사람은 모르다 죽는다는 걸 안다. 머리로 알아도 감정을 못 느끼면 결국 모르는 것이다. 호감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미움조차 느낄 능력이 없는 사람들. 필과 같은 사람에게 시간은 결코 붙잡힌 적이 없었고 그저 저쪽에서 흘러와 나를 투과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관념이었을 뿐이다. 오직 자신만 바라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딱한 필. 그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매일매일 실패한다.
공허뿐인 영원이라면 미움과 고통이 있는 생생한 현재가 낫다. 그때부터 시간은 흔적을 남기고 존재에게 늙음을 허락한다. 단지 나이만 늘어가는 텅 빈 구멍이 되지 말자. 그것이 얼마나 추한지 알고 나니 차라리 고통이 아름답단 생각이 든다.
We could do whatever we want. 영화 초반에 필이 한 말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망치는 것 말고 시간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