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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Feb 02. 2021

<리틀 베이이블루 필>

인류의 연쇄 기억 상실기

기억의 처리


최근에 기억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2019년을 마무리하던 겨울부터 2020년을 시작하던 이른 봄까지, 나는 내 첫사랑의 기억을 소환해서 소설을 한 편 썼다. 스무 살의 판단력으로 간직돼 있던 스무 살의 기억은 다시 꺼내보니 전혀 다른 색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당혹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 시절의 판단이 해석한 내 기억은 재해석되지 않은 채 꽤 오랜 시간 나를 이끌고 방해하고 조종하고 있었다. 지금과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살던 시절의 내 기억이 저절로 현재의 내 일부가 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당시엔 진실이었던 것이 지금은 거짓이고 당시엔 진심이라고 믿었던 기만이 지금의 시선으로는 고스란히 기만으로 읽힌다. 기억을 처리한다는 것은 내가 남겨놓은 일상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숙제라는 생각을 더 강하게 하게 됐다. 처리되지 않은  많은 기억은 병을 일으키고 현재를 잠식한다.


푸른 약의 등장


북클럽 호담서원의 오픈 클럽에서 읽은 정세랑의 <리틀 베이비블루 필>은 독일의 블라우 박사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이들이 새로운 정보를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 약을 개발한다는 설정으로 그 이후 벌어진 일을 그려낸 단편이다. 이 약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뇌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일으켜 3시간 정도 습득한 정보를 기억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이 약은 비환자들에게 오남용 되기 시작했고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정상적인 뇌를 가진 사람들이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8K급의 기억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이 축복이었을까?


푸른 약이 불러낸 것들


처음에는 수험생들이 먹었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교육 개혁이 일어났다. 이후에 이 약의 힘으로 사랑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영화를 생생히 기억하려고 먹는 사람들을 거쳐 고문에도 사용됐다. 고통을 끊임없이 느껴야 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기억에 빠지는' 증상에 시달린다. 시도 때도 없이 기억이 재생됐고 사람들은 원치 않아도 기억에 빠져있는 동안 현재와 단절됐다. 산업재해가 일어나고 인간의 자리를 기계가 대신고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기억으로 도망친다.


 그러다 베이비블루 필을 먹던 수험생들이 부모 세대가 되고 그들의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기억 소실 현상이 일어난다. 갑자기 불특정 한 기억들이 통째로 삭제됐다. 인간들은 기억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많은 증명서들이 수시로 갱신되고 기억 보조 장치들이 개발된다. 모두가 이 장치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 나쁜 기억은 좋게 왜곡된다. 누가 죽으면 그 옆에서 파티를 한다. 나쁜 것을 보면 바로 좋은 일로 눈을 돌리는 것이 당연해져 버렸다. 사람들은 점점 판단할 수 없게 되고 판단하지 않는다. 슬픔이 두려워 슬픈 기억을 거부한다. 소설 끝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하지만 그 전에는 이렇지 않았나요? 그 조그만 알약 전에는요? 끔찍한 일들이 없었다고 말해봐요. 그때도 사람들은 이 모든 참혹을 다 잊지 않았나요?"


같은 약 다른 반응


다행히 이 소설에는 다르게 반응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범죄 현장의 기억을 증언하기 위해 썼다. 천편일률적인 배역만 맡던 나이 든 배우들이 약의 복용을 중단하고 스스로 대본을 고르고 배역을 정해서 작은 극장에서 연극을 하기 시작한다. 기억할 가치가 있는 대사만 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일은 사람들이 진짜 배우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학계에서는 더 이상 기억력이나 오래 공부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 보유량이 실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동안 공부에 대한 노동이 지성을 인정받는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제는 그 영역을 약이 해결하기 때문에 연구의 방향성이나 창의성이 지성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가 된다. 기억력은 지성과 상관없는 시대가 열린다.


 같은 분야의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해석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책 다른 해석


  평소와 같이 나는 중요한 이슈를 담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면 꼭 독서 모임을 주선해서 내 독서 경험이 확장되는 기회를 만든다. 그것만이 내 해석과 사고의 공식이 한 관점에 매몰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북클럽에서 토론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독서의 결과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노력이나 의도가 아닌 책을 읽는 구조 곧 해석의 알고리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 글 초기에 내가 언급한 기억의 처리에 대한 생각과 맞닿는다. 아무리 좋은 책을 읽고 아무리 좋은 경험을 갖고 있고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 정보 처리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해당 콘텐츠를 처리하는 공식이 없다면 우리는 이전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고 의견을 나누었지만 이 소설이 그려낸 '기억 과잉이 일으킨 연쇄반응'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북클럽에 참여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설에서 인류가 겪는 사건들을 에피소드의 나열로 읽었다. 하지만 소설은 시간적 순서로 구성됐고 사건은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사건을 동시대에 일어난 산발적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연쇄적 반응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산발적 사건은 우연일 뿐이지만 연쇄적 사건에는 논리가 있고 논리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 작품은 가상의 미래를 통해 현실을 냉철하게 비추고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개 구조를 읽어내지 못하면 사건의 의미를 해석해 낼 수가 없다. 이런 지점은 이 작품이 제시한 문제의식과도 묘하게 겹친다.


인류의 기억 집착증 그리고 연쇄 기억 상실증

<리틀 베이비블루 필>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기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과잉 기억이 현재를 파악하는 인지 능력에 문제를 일으켰고 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끊임없이 유입되는 '기억에 빠져' 현실과 유리된다. 사람들은 많이 기억하면 더 많은 능력을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억량의 평균값만 높였을 뿐이다. 과잉된 과거가 현실을 지워버리고 중요한 일은 기계가 대신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이것은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와 너무 흡사하다. 15년 전에는 수업을 듣는 동시에 대답을 하고 질문을 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학생들이 그렇게 특출 난 유형이 아니었다. 성적이 나쁜 학생도 그런 사고처리 방식 자체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많은 저장 장치를 손에 들고 다니는 학생들은 언젠가는 공부하겠다는 공식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수업에 집중하고 이해하고 질문하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녹음하고 베껴 쓰고 저장하고 언젠간 공부하겠다는 믿음으로 정보 확보에 목을 맨다. 각 정보를 처리해서 자기화하는데 드는 시간도 계산할 줄 모른다. 점점 현재를 포착하는 능력 떨어지고 클라우드 서비스만 확장된다.


책에서 푸른 약에 중독된 인류는 더 나아가 이미 체화된 장기 기억조차 갑자기 지워지는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뇌가 유전적 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인류가 보조 기억장치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고 사람의 운영 체계 자체가 너무나 불안정해져서 보조 기억 장치가 곧 신뢰를 얻는 증표가 된다. 이런 장면들은 현대의 졸업장 병, 스펙 쌓기 신드롬과 똑같아 보인다. 기억을 많이 하는 능력으로 경쟁하고 선발하는 문화가 인류를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상태로 내몰았다. 그 결과는 판단력 상실로 이어진다.


  나는 북클럽을 하면서 과거의 영광에 파묻혀 현재에 적응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자랑할 만한 높은 학력과 지능을 갖추고 있지만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기억이 단순히 기억일 때 그것은 인간에게 독일뿐이다. 기억은 다시 해석돼야 현재와 이어진 과거가 된다. 기억 과잉에 빠진 사람들은 현실 구성 능력을 상실한다. 정세랑이 그려낸 세계에서는 그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인류는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더 나쁜 선택을 하고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수습과 미봉책으로 현실을 빠져나가려 애쓴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다


나는 교육과 독서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좋은 부모 강박증을 많이 본다. 많은 사람들이 본인에게 좋은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좋은 부모가 아닐까 봐 불안해하고 좋은 부모가 있으면 자녀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기억의 횡포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현재를 잘못 읽고 대처하는 사람만이 자기의 현재를 100퍼센트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과성은 필연성이 아니다.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은 있어도 좋은 부모상은 따로 없다. 각자의 최선이 있을 뿐이다. 사람과 사람은 어차피 서로 맞고 안 맞고에 따라 좋고 나쁜 인상이 결정된다. 세상에 둘도 없는 성품을 갖췄어도 부모나 자녀와 성격이 안 맞으면 갈등과 원망이 있을 수밖에 없고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뻔한 얘기를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지만 생각보다 많은 실수가 뻔한 것도 모르고 뻔한 것을 무시해서 발생한다. 좋은 부모라는 결과에 집착하면 그 노력조차 자녀를 위한 행동이 아닌 것으로 변질된다.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파악하고 그것에 성실하게 반응하고 그 반응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 집중해도 기억은 현재의 처리 속에서 자연스러운 과거가 되고 미래를 만들어내는 자양분이 된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좋은 기억이 없어서 많은 정보가 없어서 현재가 망가진 것이 아니다. 기억을 쌓기만 하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다. 내가 기억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부모를 언급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을 뒤흔드는 강력한 기억이 부모와 관련돼 있고 그 기억을 단 한 번도 성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지 않은 채 자기변명의 탈출구로 쓰는 것을 너무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억으로 미래를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있을까?


좋은 것을 많이 확보한 사람은 그것을 지키고 들여다보기 바빠서 현재를 보려 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연인들은 가장 좋은 연애 초기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약을 삼켰고 그 결과 잠깐의 행복한 연애와 아주 긴 인류의 퇴보를 경험했다. 짧게 보면 좋은 것들이 길게 봐도 좋을지 소설 속의 인류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장기의 결정적 사건들이 정말 영향인지 기억의 고집인지 한 번쯤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3시간의 행복을 기억할 수 있다면 이 약을 먹겠냐고 누군가 나에게 질문했다. 난 먹지 않겠다고 했다. 다시 꺼내 재생할 수 있는 행복을 굳이 저장해야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 희망도 없는 정말 영원한 불행만이 기약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삶이 있다면 이런 약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쉽게 약 한 알을 먹고 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세상 누가 나와 이웃의 행복을 위해 살려고 할까. 그리고 그 상태에서 나에게 행복 생산 능력이 계속 남아 있을까. 너무 많은 능력이 내 몸에서 빠져나갈 것이 분명하다.


조금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삶을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이 약의 오용이 시작됐다. 그렇게 교육받은 세대가 심각한 자손을 생산했다. 좋은 것만 겪으려 하고 어떻게든 힘들지 않으려 하고 많은 것을 확보해서 그것을 까먹으며 평생을 살려하는 병든 의도는 반드시 인간을 무능하게 만든다. 대학을 갔다고 인생이 성공한 게 하니고 취업을 했다고 고생이 끝난 게 아니듯 좋은 부모 밑에 자랐다고 사람이 행복하고 좋은 기억이 많다고 사람이 건강한 것이 아니다.


 아무 문제없는 현재의 삶까지 과거의 기억으로 물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단편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말 그 파란 약이 생기면 그 많은 기억을 처리해서 삶을 건강하게 이끌고 그 능력을 잘 써먹을 자신이 있는지 생각해 볼 계기가 될 것이다. 오래된 동화가 현재의 거울이듯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가 곧 지금의 이야기다. 기억에 집착하기보다 기억을 꺼내 재해석하는 사람만이 그런 알고리즘을 가진 사람만이 작은 푸른 알약 없이도 많은 것을 기억하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작품에서 이 약을 만든 박사가 말했다.


그러라고 만든 약이 아니다.




그렇다. 기억은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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