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살라, 그곳에서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고독했다

by 물들래


흙빛이 강한 맑지 않은 호수에 커다란 잉어 떼들이 유유히 춤추듯 떠다녔다. 달호수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오른 안개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 희뿌연 안갯속에서 귀곡산장을 찾아 헤매는 듯한 심정으로 우리 일행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잠시 지친 다리를 쉴 겸, 달호수 근처 허름한 찻집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달호수를 배경으로 짜이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이게 여유고, 녹색 평화구나,라는 생각이 밀물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달호수에서 짜이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금세 흐리고 축축했던 그립디그리운 다람살라 풍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달호수 산책길 어디쯤에선가, 프랑스 남성 여행객의 따뜻하고 천진스러운 미소를 만났다. 우리는 동시에 웃으며 같은 여행자로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다람살라에 머무는 4박 5일간 그 이후로도 여러 번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그저, 싱긋 반가운 웃음을 서로에게 건네는 여유만 가져도 이미 우리는 마음 부자인 것이다.


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나는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고독했다. 행복과 고독뿐이랴. 기쁨과 즐거움도 맛보았고, 분노와 고통도 느꼈다. 어느 순간 슬펐고 외로웠으며 함께 있지만 혼자인 것 같은 착각이 일 때도 있었다.


인도는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시험하는 여행지임에 틀림없다. 인도에서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변했던 내 감정의 변화에 자주 당황해하곤 했으니까.


다람살라는 우리의 모습과 참으로 많이 닮아서 정이 갔던 티베탄의 정다운 미소와 함께 D 씨의 천진난만한 미소도 함께 떠오르는 장소가 되었다. 다람살라에서의 둘째 날, 배탈 설사로 고생했던 D 씨를 숙소에 남겨두고 우리 셋만 달호수를 산책하고 돌아왔더니, 숙소 앞, 옷 가게에서 D 씨는 티베탄 전통의상을 사 입고 어색한 듯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다람살라에 머무는 내내, 많은 사람들이 현지인으로 착각할 만큼 전통의상을 입고 다녔던 대철 씨의 모습은 우리가 봐도 정말 티베탄 같았다.


어느 날은 사원을 둘러보다가 수업을 막 끝내고 나오는 라마승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사원에서 수도하는 승려들이 공부하는 진지한 모습도 살펴보았다. 승려들이라면 항상 고요하게 도만 닦을 것 같지만 젊은 승려들은 야외에서만큼은 유쾌하고 즐겁게 놀았다.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즐기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뭐랄까? 어딘가 매여있지 않은 듯한 그들의 평화롭고 순박한 표정들, 두 명씩 짝을 지어 악기를 연습하던 모습들을 사진으로 다시 보면서 미소 짓고 있다.


그러다가 화창한 사원 뜨락에 갑자기 쏟아지던 거센 빗줄기, 순간 확 끼쳐 오던 비에 젖은 흙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으로 묘하게 울렁거렸던 추억들을 내 어찌 잊으랴?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리운 풍경들과 다람살라 거리의 소음과 냄새들이 이십여 년이 흘렀어도 그곳을 향한 그리움으로 내 오감을 작동하며 막무가내로 자극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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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에서 만난 모자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티베탄 아주머니와 그녀의 아들은 너무나 친근해서 우리 아파트 위층에 사는 꼬마 녀석이 떠올랐다. 너무나 한국적인 아주머니의 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뒤로 아름다운 푸른 산이 펼쳐져 있었지만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멋진 배경이 드러났다면 더 멋진 사진이 됐을 텐데. 그럼에도 3인의 표정은 맑음 그 자체다. 그거면 됐다.

그날 저녁 우리는 중국 식당에 가서 야채 덮밥이라는 초초 라이스와 오믈렛으로 저녁을 먹고 골목길 순례에 나섰다. 그곳에서는 액세서리, 모포, 티베탄 전통의상, 한 종이로 만든 공책, 야채, 과일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골목길 액세서리 숍 아티스트인 인디언 청년은 자신의 가게 안으로 초대해서 밀크티를 대접해 주었고,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하라며, 우산까지 빌려주는 선행을 보였다. 부끄러워하며 은비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는 특히 매부리코가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인도 청년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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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사원과 샘, 그리고 개울이 함께 어우러진 산책로로 이어지는 폭포를 향해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이 차고도 습한 공기가 왜 나를 이렇게 끈질기게 부여잡는 거지? 지금 내 마음은 습기가 필요한가 보다. 너무 건조한 내 정서에 물기가 촉촉하게 배게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그곳에 더 멈춰서 머물게 되더라. 이 도시는 내면이 건조한 사람들이 머물기에 딱 좋은 도시가 아닐까 싶다. 닷새간 그곳에 머무는 동안 습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으니까. 내 마음을 흠뻑 적셔준 다람살라!


다. 람. 살. 라. 도시명도 발음하기에 딱 좋다. 왠지 발음하는 동안 내 마음이 둥글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푸릇하고도 무성한 아름드리나무와 다람쥐와 함께 살고 싶어지는 도시로, 다람살라, 그대를 명명하고 싶다.


사원을 내려오면서 뒤로 처져 혼자가 되어 걷던 거리에서의 고적한 상념들,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오묘한 빛깔이 뒤섞이던 마음속 풍경을 지금 이 순간, 난 과연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는지? 짙은 잿빛과 옅은 보랏빛, 거기에 녹색이 살포시 섞여있는 느낌의 정서로 내 온몸을 휘감듯 덮쳐오는 다람살라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내 어찌할까.


다람살라의 날씨는 유독 변덕스러웠다. 햇빛이 쨍쨍하다 싶어 테라스에 빨랫줄을 걸어놓고 빨래를 널고 돌아서면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러다 빨래를 걷어서 숙소에 다시 널어놓고 산책을 나서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솟고... 그러다가, 다시 쏟아지던 비. 그래서 우리 모녀는 가방에 우비를 늘 챙겨 넣고 비가 올 때마다 요긴하게 사용했다.


시바 사원 앞 호수에서 덜덜 떨며 수영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거대한 물살이 내려 꽂히던 폭포, 인도는 뭐든지 한국의 아기자기한 풍경에 비해 스케일이 컸다. 그런 자연 풍광 앞에서 우리 모녀는 점점 더 작아지기만 했다. 하기야 땅덩어리가 우리의 33배라고 하지 않던가?


시바 사원에서 20분 정도 더 오르니 높이 20m 정도의 시원한 폭포가 나왔다. 폭포로 오를 때 내리던 빗길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이순의 나이에 난 다시 다람살라, 시바 사원을 향해 비 오는 날 산책을 나설 수 있을까? 자꾸 인도의 향기가 나를 부른다. 더 늦기 전에 다시 인도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비를 피해 잠시 폭포 옆 돌 기념품점으로 들어섰다. 주인은 간 곳 없고, 여행객들만 쏟아지는 비를 피해 잠시 다리 쉼을 했다. 여행객들이라야 거센 빗줄기 때문에 우리 일행과, 젊은 현지인 한 팀이 고작이었지만.


쏟아져 내리던 빗소리와, 우레 같던 폭포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폭포와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여행에서만 특별히 느낄 수 있는 비 오는 날의 묘미를 한껏 내 안으로 채워 넣었다.


요가학교를 찾아 나선 D 씨와 함께 아름다운 산책로를 따라 들어섰으나, 정작 요가학교는 못 찾고 우리 일행은 풍광이 뛰어난 주변 경관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먼 산을 바라보며 서 있곤 했다. 우측으로 펼쳐져 있던 캠핑장의 전경이 펼쳐졌다. 전망 좋은 이곳에서 여러 날 머물며 날씨 멍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외국인 여행객을 상대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과일을 사서 그곳으로 이동하는 유럽인의 뒷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장소였다.


은비와 오붓하게 나선 아침 산책길에서 우리 모녀는 정말 귀여운 아이들을 만났다. 좌측 사진은 다람살라에 위치한 TCV(TIBETAN CHILDREN'S VILLAGE)의 아침 풍경이다. 비가 내려서 습하고 흐린 날씨에도 아이들의 모습이 어우러진 아침 교정은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창틀도 푸르고 아이들이 입은 교복도 푸르다.


사랑과 자비를 배우며 크는 아이들의 학교였다. 먼저 아이들의 밥과 옷을 입던 아이들이 다음 아이들의 밥과 빨래를 해 준다는 학교, 인도의 변방인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그곳에 스물 다섯 청년 달라이라마가 세운 티베트 어린이 마을, 그곳에서 바라보면 그들이 떠나온 조국의 먼 설산이 보였다. TCV는 빼앗긴 나라의 모국어로 공부하는 아이들의 학교였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수업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카메라를 꺼내 들자, 서로 자신을 찍어달라며 앞으로 나섰다. 도저히 통제가 안 돼서,


"차렷, 주목."


하고 언성을 높였더니 금세 반듯한 자세로 자리 정렬을 했다. 콧물이 흐르던 녀석, 앞니가 빠진 녀석, 카메라를 들이대면 유난히 수줍어하던 녀석, 다 찍은 후, 디카로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주자 신기해하던 표정들. 지금도 이 녀석들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미소가 얼굴 전체로 번지는 걸 느낄 수 있다. 20년이 지났으니 모두 성인이 되어 자기 몫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겠지. 비록 현재의 삶이 힘들더라도 잘 견디고 버텨내면서, 웃을 수 있는 그날을 반드시 맞이하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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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에서의 마지막 날 밤, 맥끌로에서 맥주와 함께 그린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러나 우리(D 씨, 진, 은비, 나) 앞에 놓인 샐러드에서는 그린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웨이터에게 우스갯소리로,

"이건 그린 샐러드가 아니라 화이트 샐러드다."

했더니,

"아니다. 그건 그린 샐러드가 맞다."

정색하며 부정했지만 웃고 있던 웨이터의 익살맞은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게 기억됐다.


비 내리는 2층 맥끌로 레스토랑은 외국인들로 자리가 거의 채워져 있었다. 지금 내가 여행 중이라는 실감이 났고, 기분 좋은 술렁거림 속으로 자연스레 젖어들었다. 그린 샐러드이나 전혀 녹색을 찾아볼 수 없는 화이트 샐러드 앞에서 호박만 한 크기의 맹맹한 인도 오이의 추억을 간직한 채로 다람살라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맥주 한 잔에 띄워 보냈다.


다람살라의 습한 기후가 처음엔 정말 좋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그 습하고 선선한 날씨가 내 몸 상태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다음 여행지로의 긴 이동을 위해 대철 씨의 도움으로 침을 맞고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고 몸을 달래야만 했다.


새롭게 합류하게 된 일행(노총각 미술교사 L 씨, 국어교사 K 씨, 과학교사 M 씨, 그리고 깔끔하기로 소문난 도예가 S 씨)과 스리나가르로 향한 새벽 4시 출발 지프를 대여해 놓은 상태라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스리나가르로 향하는 열여섯 시간의 지프 여행은 환상적이기도 했지만, 내 체력의 한계를 확실히 깨닫게 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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