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도서관

서귀포 공포의 중앙칠거리

by 물들래

서귀포에 오면 중앙로터리 근처에 숙소를 잡곤 했다. 로터리는 보통 사거리나 오거리가 흔한데 서귀포 중앙로터리는 “공포의 칠거리”로 제주도에서 교통사고가 가장 잦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교통사고가 빈번한 이유는 기형적 도로 구조 때문이다. 실제 중앙로터리는 일곱 개 방면 도로와 연결된 칠거리인 데다, 차량이 교통 신호를 받고 통행하는 방식과 타원형 중앙 화단을 따라 회전하는 방식이 혼재돼 있어 운전자에게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도대체 어디로 빠지라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곳이다.


서귀포에 머무는 동안 공포의 칠거리를 여러 차례 오갔다. 서귀포도서관을 오갈 때도 공포의 칠거리를 통과했다. 적응이 될 만하다가도 교통체증이 심한 경우에는 난장판이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주변에서 클락숀을 울려대도 긴장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사고 방지를 위해 비상등을 켜고 우선 양보하거나 양보해 줄 것을 바라는 것이 최선이다.


서귀포에서의 첫날 아침에는 도보로 이동했다. 서귀포 올레시장을 통과하면서 유명한 할머니 떡집에서 오메기 떡을 사서 요기했다. 서귀포에 올 때마다 이중섭 미술관과 이중섭의 한 평방을 둘러보곤 했으니 열 번도 넘게 이중섭 화백과 시공을 초월한 만남을 경험한 셈이다.


20여 년 전 첫 방문 이후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미술관 건축물이나 전시 규모가 천재화가이자 국민화가로 알려진 '이중섭' 명성에 걸맞은 미술관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미술관 측에서도 비슷하게 느낀 탓일까? 다행히 2025년 11월 방문했을 때는 시설확충공사를 시작한 시점이었다. 2027년 2월에 개관 예정인 걸 보면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할 계획인 듯보였다. 멀리서도 이중섭 미술관이란 것을 느낄 수 있는 외관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암동 환기미술관, 평창동 김종영미술관, 양구 박수근미술관, 춘천 이상원미술관, 양주 장욱진미술관, 예산 이응노미술관, 창원 문신미술관, 제주 김창열미술관이나 유동룡(이타미 준) 미술관, 이왈종미술관,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 말라가 피카소미술관, 피게레스 달리미술관, 오슬로 뭉크미술관, 지베르니 모네미술관처럼 외관만 보고도 그 화가가 떠오르는 건축물말이다.


8개월 만에 다시 찾은 이중섭 미술관, 그래도 지척에 위치한 이중섭전시공간 창작스튜디오전시실에서 이중섭 아카이브 전시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모처럼 미술관을 찾았을 방문객들을 그나마 위로하고 있었다.


이중섭 한 평 공간 앞에 설 때마다 마음속에 형상화한 이미지를 꺼내보았다. 엉키고 포개진 가족의 모습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어떻게 이 공간에 4인 가족이 머물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다. 그러다 궁핍했던 내 어린 시절 단칸방에 6인 가족이 나란히 이부자리를 펴고 잠들던 때를 반추하며 까마득한 추억에 젖어들었다.


이중섭이 자주 발걸음했을 섶섬과 문섬이 보이는 바닷가 앞에 섰다. 검은 바위 우거진 자구리해안에서 두 아이와 함께 게를 잡으며 행복했을 삼부자 모습이 눈에 보이듯 선했다. 그들을 바라보며 자구리물가에서 빨래했을 제주아낙들 모습이 풍경화 속에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지천에 피어있는 노란 머위꽃이 따뜻한 시선으로 이화백 가족을 바라보았을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나절을 자구리해안 나무벤치에 누워 해바라기 시간을 보내다가 서귀포도서관으로 이동했다. 이중섭 관련 책을 읽고 싶어졌다. 이미 읽었던 책이지만 박재삼 시인이 엮은 책,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 - 편지와 그림에서 묻어나는 이중섭의 삶과 사랑』을 펼쳐 들었다.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이 아니겠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을 꼭 하나만 희망하고 노력하여서 지키도록 합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마음을 한 군데로 집중하고 골몰하는 일이오. 37쪽


한 곳으로 마음을 집중하고 몰두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랴. 그렇지만 앎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중섭도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괴리 속에 힘든 순간들이 있었으리라. 그 순간들을 고뇌하며 그림으로 표출했겠지. 때로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편지글로, 일기형식으로 남겼으리라. 그 흔적들을 읽고 있노라니 가슴에 진한 연민이 솟아났고, 규정지을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더욱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128쪽


아내를 향한 그리움을 이토록 진하게 표현한 자가 있을까. 멀리서 이 편지를 읽고 남편에 대한 진한 사랑으로 가슴 뜨거워졌을 아내 마사코의 표정은 어땠을까. 끈끈하게 밀착된 유대감으로 지냈던 이들이 만지고 싶어도 결코 만질 수 없는 곳에서 느꼈을 거리감은 어땠을까.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신의 힘찬 애정을 전신에 느껴, 남덕은 마냥 기뻐서 가슴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 나는 온 세상의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합니다. 165쪽


애정 가득한 편지에 대한 답신을 받고 울컥했을 이중섭의 모습이라니... 비교불가능한 사랑을 실감한 마사코의 글에서 순간이지만 마사코의 향기라도 맡은 듯 눈시울을 붉혔을 대향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함께 했던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기에 그들 부부의 사랑이 더 진한 향기로 전해졌다.


지금 우리 부부의 삶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따로 또 같이'를 적절하게 실천하며 살고 있는 모습이 나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사코의 답신과는 달랐지만 나다운 표현으로 42년 룸메에게 고마움과 애정을 전했다. 내 글을 읽자마자 그 다운 짧은 답신이 돌아왔다. '미투' 그저 웃을 밖에.


이중섭의 그림과 편지글로 이루어진 책 한 권을 읽고 나니 시장기가 발동했다. 도서관을 나와서 실하게 영근 감귤이 주렁주렁 열린 현무암 울타리를 따라 걸었다. 현무암 밖으로 주홍빛 감귤이 탐스럽게 손짓했다. 내 새콤달콤함에 빠져보라는 듯. 수년 전 가을, 강릉 시내를 걷는데 온통 감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를 걸었던 기억이 났다. 참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때도 주홍빛 축제였는데 서귀포도 지금 감귤 축제였다.


봄에는 녹색으로 가을에는 주홍색으로 단장하는 두 개의 계절, 그 사이의 계절 여름이 유독 고마웠다. 문득 어제 아침, 광치기해변 노점상 아주머니께 구입한 새콤달콤하게 잘 익은 감귤이 생각났다.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있는 감귤을 떠올린 순간, 벌써부터 입안에 흥건히 침이 고였다. 식사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후식으로 먹을 생각에 행복해졌다.


저녁 시간이 되자, 도서관 이용객들은 좀 더 집중하는 분위기 속에서 독서를 하거나 개인 공부에 빠져들었다. 배낭을 열었다. 여행을 시작하며 준비해 온 세 권의 책 중 마지막 책을 꺼냈다. 한국계 미국 작가 김주혜의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이다. 이 책은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았다.


김주혜는 2024년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열린 야스나야폴랴나상 시상식에서 『작은 땅의 야수들』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키릴 바티긴과 함께 해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해외문학 부문 최종 후보 10개 작품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 등을 제치고 영예를 안았다.


2025년 9월,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김주혜 작가의 강연을 두 차례 신청해서 들었다. 오랫동안 여성의 것이 될 수 없었던 글,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부수고 조합하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세상의 모든 딸, 엄마, 아내. 여성 작가들의 글쓰기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난생처음'인 것을 시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오면서, 여성으로서의 삶이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발견해 보는 강연에서 김주혜 작가에게 질문했다. 한국작가로서 세계무대를 대상으로 창작하는 당신을 작가가 되고 싶게 강력하게 흔들었던 문학작품이나 작가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김주혜 작가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를 언급했다. 박완서 작가를 통해 소설 쓰기를 공부했다던 김주혜 작가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겹쳤던 관계로 주목을 덜 받았다.


김주혜 작가와의 북토크를 마치고 귀가해서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를 책장에서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이야기꾼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책 속에서 왁자지껄했다. 살아있는 인물이 내 앞에서 움직였다. 박완서는 천생 이야기꾼이었다. 김주혜로 인해 오랜만에 박완서 작가의 책을 다시 읽게 됐다.


김주혜가 아는 가장 용감한 여성은 어쩌면 어머니였으리라. 박완서가 어머니를 존경했듯, 김주혜 역시 어머니를 언급하는 동안 존경심이 가득 느껴졌다. 김주혜 작가가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글 쓰고 독서하며 문학을 가까이했던 어머니의 영향이었으리라. 톨스토이와 박완서라는 거장의 문학세계 아래서 김주혜는 멈추지 않고 필력을 이어갈 것이다. 김주혜 작가와 두 번의 만남을 통해 그런 믿음이 저절로 생겨났다.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 작품인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은 무척 재미있게 완독한 책이다. 아껴서 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600쪽이 넘는 분량이었지만 책장 넘기는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작가 김주혜의 모습에서 작중 인물 옥희와 월향의 모습이 보였다. 가독성이 좋다는 건, 일단 소설로서 합격점 이상이다.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작품이니 작품성은 이미 입증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 내가 말했지, 호랑이를 죽이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만이라고. 그리고 그건 호랑이 쪽에서 먼저 너를 죽이려고 할 때뿐이다. 그럴 때가 아니면 절대로 호랑이를 잡으려 들지 말아라. 알겠느냐? 23쪽


다른 건 다 잊어버리고, 절박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가장 위험하다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240쪽


월향은 혼자만의 생활에 꽤 만족하는 듯 보였다. 고독은 그를 감싸는 아름다운 외투 같았다. 375쪽


단이는 그에게 있어 영감의 잉크라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모든 면에서 특별한 사랑이었다. 468쪽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것에 대한 소망도 동경도 느끼지 않았다. 나(옥희)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603쪽


평양에서 시작한 작품은 제주의 바닷가에서 막을 내렸다. 한반도를 관통하는 소설이었다.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그녀의 마음속 모어는 한국어일 테고,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작품 곳곳에서 느껴졌다. 엔딩에서 2% 부족한 부분을 살짝 느꼈지만 모처럼 쉽고, 재밌게, 풍경이 그려지는 작품을 읽고 나니 의외로 여운이 길었다.


주인공 옥희의 이후 삶도 응원했지만, 무엇보다 월향의 이후 삶이 궁금했다. 어쩌면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내는 딸아이의 삶이 오버랩돼서 일듯 싶다. 김주혜 작가의 확장된 시선, 갇혀있지 않고 열려서 펼쳐져 있는 인식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완독 후 동적인 활동을 하게 만든 것은 작품 속 현장감이다. 역사의 흔적을 느끼며 작중에 언급한 곳곳의 현장을 생생하게 느끼며 걷고 싶은 바람이 일었다. 그때의 풍경은 사라졌겠지만 땅은 분명 그 시절과 동일한 위치일 테니 말이다. 흙이 아니라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이루어진 지형이더라도. 길 위에서 우리의 삶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던가. 살아가다 사라지고, 다시 이어지는 삶. 지금 이 시간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질 터이니 최소한의 후회만 남기며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서귀포에서의 이튿날과 사흗날은 서귀포도서관에서 작은 땅의 야수들을 만나는 재미로 채워나갔다. 밤 10시 폐관하기 직전까지 『작은 땅의 야수들』을 만났다. 그들은 끊임없이 달리고 걷고 싸우고 화내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느끼고 사유하면서 그들의 삶을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처절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밤 열 시의 어둠을 뚫고 도서관을 나서는데 저 멀리 어두운 거리에서 빛나는 야수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곳은 결코 작은 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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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공포의 칠거리 & 이중섭의 한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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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도서관 & 쇠소깍 테라로사 커피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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