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조망권은 보너스
서귀포 기당미술관 입구 표지판 앞에서 생각난 영화 한 편, 바로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 동시에 영화 포스터도 함께 떠올랐다. 노란 우산을 받쳐든 젊은 남녀의 풋풋한 모습이 인상적인 포스터 말이다. 동물원이 아닌 도서관이라니... 표지판 앞에서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도서관 애호가여서일까? 미술관 옆 동물원보다 도서관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마음에 들었다.
서귀포 올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찾는 곳, 바로 삼매봉 도서관이다. 완벽한 삼박자의 조화, 도서관과 미술관, 그리고 한라산 조망권까지 모두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도서관 휴게 전망대에 서있노라니 가시거리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활짝 트인 한라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줄 모를 지경이다.
한라산은 동서남북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모두 다르다고 했다. 그 말을 듣기 전 까지는 모두 비슷한 풍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로 한라산을 바라볼 때면 비슷한 듯하지만 각 방향에서 바라보노라면 조금씩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몇 년 전 한라산을 자주 그리는 채기선 화백의 전시를 관람했던 적 있었다. 그때 한라산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을 통해 그 다름을 확연히 느꼈었다. 사계절마다 다른 풍경,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만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생소함을 전하는 모습이라니.
아침 일찍 도착한 도서관에서 개관시간 전까지 한라산과 함께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했다. 개관에 입장해서 점심식사 전까지 어린이도서 열람실에서 여러 권의 그림책과 시간을 보냈다. 많은 그림책을 둘러보며 표지에 마음을 빼앗긴 몇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넓은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서 천천히 감상했다. 글보다 그림으로 위로받는 순간이었다. 부담 없이 읽고 싶어서 그림책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떤 문학책보다 그림책이 내 마음을 술렁거리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끼는 그림책이라 소장하고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니 더 반가웠다. 다시 읽고 봐도 얼굴 가득 미소 짓게 만드는 책이다. 보통 그림책은 그린이와 글쓴이가 동일한 경우가 많은데 [도서관]이란 그림책은 달랐다. 글도 좋지만 그림이 더 마음에 스며드는 책이었다.
데이비드 스몰이 그리고, 사라 스튜어트가 쓴 [도서관]은 책 좋아하는 친구들이 자주 빌렸던 탓일까? 많이 낡고 닳아 있었다. 그 흔적조차 기쁨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라니.
무엇보다 작가가 버지니아 울프와 톨스토이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챌 수 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림으로 힌트를 준 게 좋았다. 작은 그림이 단서가 돼서 런던 블루플라크를 따라 걷던 길을 떠올리게 했다. 울프의 생가를 찾고, 그녀가 자주 방문했던 도서관에 들러 책의 향기에 빠져들었던 추억과 함께 런던 거리를 헤매며 산책하길 좋아했던 버지니아 울프를 추억했다.
런던에서 다시 모스크바와 야스나야 폴랴냐로 이동했다. 톨스토이 작품, [안나 카레니나]와 [이반일리치의 죽음]이 탄생했던 순간을 잠시나마 현장에서 느꼈던 시간을 반추했다. 단박에 시공을 초월한 상태로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라니. 놀라웠다. 그림책 한 권이 나를 영국으로, 러시아로 추억여행 다녀오도록 도운 셈이다. 이게 그림책의 힘인 걸까? 고마운 시간이었다.
그림책 읽기를 마치고, 또 다른 책을 찾았다. '엄마의 책상' 독서모임에서 다룰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검색했다. 고맙게도 책꽂이 한편에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작디작은 감동을 담은 책이었다. 어린이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 마음이 따뜻해졌던 독서였다.
마음 아프게도 두 아이의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었다면 좀 더 기다려주고, 이해해 주고, 좋은 어른 친구가 되어주었을 텐데. 어린이라는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며 시행착오 속에 양육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책을 만난 부모라면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주는 격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으리라.
"어른은 빨리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18쪽
작가의 마음이 담긴 책이라니... 읽는 도중 몇 차례 진심이 느껴졌던 순간은 어쩌면 작가의 마음이 내게 도착한 시점이었으리라. 이심전심을 몇 차례 경험하고 나니, 도서관 창밖 한라산이 어스름한 저녁기운에 가려지고 있었다.
잠시 야외 휴게 전망대로 자리를 이동했다. 한라산이 내뿜는 밤의 정기를 받기 위해 깊이 심호흡했다. 같은 공간인데 낮 풍경과 밤 풍경이 정말 다르게 전달됐다. 11월 중순이라 밤기온이 유독 찼다. 그 찬기운이 나쁘지 않았다. 산봉우리가 없는 모양의 산, 두모악 쪽을 한참 응시하고 있노라니 한라산 자태가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드러났다.
저녁 산책을 마친 후, 필사를 시작했다. [작은 땅의 야수들] 책을 다시 펼쳤다. 내 마음의 밑줄을 옮기기 시작했다. 읽었을 때의 감동이 펜을 잡은 손끝으로 옮겨지니 더 진한 감격으로 새롭게 채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