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the purpose of your visit?”
미국 공항 입국심사대 앞에서 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간단한 질문 하나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엔 진땀이 났다. 더듬더듬 겨우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내가 한 영어 공부는 뭐였는지 한탄이 절로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영어에 한이 맺혔다. 고등학교 땐 수능 영어, 대학 땐 토익 영어를 공부했다. 외우는 단어는 많았지만, 정작 외국인을 만나면 말문이 막혔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라며 출근 전에 영어 회화학원을 다녔다. 3년 전엔 복지관 영어 수업을 들었지만, 여전히 영어는 내겐 난공불락이었다.
2년 전 방송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 연수를 다녀오고 나는 다시 결심했다. 이제는 진짜 말할 수 있는 영어를 하자고. 복지관 영어 선생님과 당시 함께 수업을 들었던 연배 높은 언니들과 소그룹 스터디를 만들었다. 1년 가까이 매주 모여 일상 영어를 연습했다.
지금은 일이 바빠져 스터디는 더 이상 못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영어 공부를 접을 내가 아니다. 내 방 화장대 옆에 태블릿 PC를 두고 매일 <윌라> 클래스에서 영어 회화 클립 영상을 본다. 아침, 저녁으로 화장하고 머리 말리면서 짧은 영어 문장을 하나씩 따라 말했다.
‘오늘은 이 한 문장만 제대로 말하면 성공한 거야.’
매일 조금씩, 꾸준히 영어를 내 일상으로 끌어들였다. 10분 내외 100개의 영어 클립 영상을 끝까지 듣고, 다시 또 반복하고 있다. 하루 30분 내외로 하는 영어 공부는 생각보다 성취감이 컸다. 오늘 외운 문장을 내일 까먹어도 괜찮았다. 다시 또 보고 익히면 되니까.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사람이 어떤 일에 반복적으로 도전하고 작게나마 성취할 때 자신에 대한 믿음인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 올라간다고 했다. 자기 효능감이 높아지면 더 도전하고, 도전하니 또 성취하고, 이 선순환이 결국 실제 능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심리학자 제임스 클리어(James Clear)는 작은 습관의 반복이 습관 형성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며 “아주 사소한 변화라도 매일 반복되면 결국 삶을 바꾸는 힘이 된다”라고 강조했다.
어느 날 미국 드라마를 보는데, 전보다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물론 영어 실력이 엄청나게 는 건 아니다. 여전히 어려운 대화는 못 하고, 복잡한 문장은 놓칠 때가 많다. 하지만 간단한 말은 들리고, 따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로도 나는 만족스럽다.
잊고 살았지만 내 오랜 꿈은 세계 일주가 아니었던가. 지금 당장은 떠날 수 없어도, 매일 한 문장씩 배워두면 언젠가 그 꿈에 한 발짝 가까워질 거라 믿는다. 나는 조급하지 않다. 그저 오늘도 화장대 앞에서 영어 한 문장을 따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