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9년 차이지만 아직도 운전대만 잡으면 후들후들 떨리고, 극도로 긴장한다. 집 근처만 왔다 갔다 할 정도라서 1년 동안 3,000km도 채 달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왜 운전하냐고? 처음엔 운전을 하지 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뚜벅이로 살까도 싶었다. 하지만 나는 경기도 고양시민이다. 10년 전 이곳으로 입주할 무렵보다 교통편이 좋아지긴 해도 마을버스 한 대를 놓치면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이대로 내 아까운 시간을 길바닥에 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10년 전, 장롱면허를 청산하고 다시 운전하려고 할 때, 남편은 호기롭게 내게 운전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남편이 굳이 가르쳐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남편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그는 융통성 없이 될 때까지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의 지론에 따르면 아파트 주변만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돌면 될 거라고 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의 말대로 같은 곳을 전전했다. 정말 내 머리가 돌 정도로 끊임없이 돌았던 것 같다. 결국 아파트 입구에서 반대편에 오는 차를 피하려다 그만 사고가 났다. 다행히도 희생양은 화분이었다. 인심 좋은 경비원님 덕분에 쓰러진 화분을 세우고 정리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미 사고를 냈단 생각에 내 가슴은 두근두근 요동치기 시작했다. 예상했겠지만 그 뒤 한동안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운전은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살았다.
아이가 5살이 되고, 유치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 동네에 평판 좋은 단설 유치원에 보내는 건 내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입학 대기 후보 40번.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던 덕분일까. 가까스로 그 단설 유치원에서 입학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문제는 후보로 들어가서 셔틀버스를 타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 유치원은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라서 도보로 데려다 주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며칠 고민하다가 그 유치원에 꼭 보내고 싶은 욕심에 일단 보내자고 결심했다.
아이는 셔틀버스뿐만이 아니라, 오후 돌봄도 되지 못했는데 오후 1시 하원은 내게 가혹했다. 아침에 걸어서 아이를 등원시키고, 점심도 못 먹고 근처 커피숍에서 일했다. 어김없이 1시가 되면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이를 옆에 끼고 다시 일하는 일상이 너무 벅찼다. 오랫동안 동경했던 단설 유치원을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다시 운전을 해볼까?’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왕초보 운전자한테 특화되어서 A부터 Z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여자 선생님이 있대요.”
지친 날 위로하듯이, 동네 아이 친구의 엄마가 운전 연수 선생님을 추천했다. 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걸 덥석 물었다. 하루 2시간, 5일 도로 주행 연수. 고작 10시간으로 과연 장롱 면허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오른쪽 다리를 운전대 중앙에 놓아야 한다는 거, 바닥에 다이아몬드가 있으면 곧 신호등이 나오는 신호라는 거, 사이드미러로 뒤차 전체가 예쁘게 다 나오면 끼어들기를 해야 한다는 거... 등등 셀 수 없는 꿀조언으로 선생님은 날 안갯속 주행이 아니라, 예측할 수 있는 주행으로 이끌어줬다.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운전을 못했을 것 같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스승님을 만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의 목표는 두 정거장 거리의 아이 유치원에 차로 왔다 갔다 하는 거였다. 목표가 크지 않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아이 등·하원 책임져야 해야 하니까 매일 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뭐든지 매일의 힘이 무섭다. 운전대를 잡고 너무 경직되다 보니, 내비게이션은커녕 신호 바뀌는 것도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내가 어느새 유치원 앞 고난도 U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운전에 자신감이 조금 생기기 시작할 무렵 아이에게 큰소리치며 말했다.
“꾸마도 엄마가 운전하는 게 좋지? 대단하지?”
“엄마들은 당연히 운전하는 거 아니었어?”
“운전을 결국 해낸 엄마가 대단해! 멋있어!” 이런 걸 기대했는데, 아이의 예상 밖의 반응에 난 실망했다. 하지만 그 낙심의 순간도 잠시, 그동안 교통편이 좋지 않은 이 동네에, 게다가 다들 운전하는 엄마들 사이에서 꼿꼿하게 장롱면허를 고수했던 엄마가 바로 나였음을 뒤늦게 자각했다. 아이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는데, 내가 너무나 당당하게 유세를 떤 게 아니었나 싶어, 괜스레 겸연쩍고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그렇게 아이 말마따나 마땅히 그러하듯이 운전하게 되었다. 9년 동안 동네만 왔다 갔다 하는 정도로 만족하면서 지냈다. 운전에 조금 익숙해진 거라 현재 살고 있는 고양시에서 서울로 운전은 꿈꿀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렵고,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세상사 아니던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교회는 서울 중심부에 있다. 교회를 오갈 때 남편이 운전하니까 구태여 내가 운전할 필요는 없었고, 이 실력으로 내가 서울로 운전하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랬던 내게 위기가 찾아왔다. 4개월 전, 아이가 교회 합창단에 입단하게 되면 매주 토요일 연습을 위해 토요일에도 교회에 와야 했다. 남편이 운전하면 되지 않냐고? 남편은 일 특성상 토요일에도 근무한다. 그럼 남은 건 나뿐이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그렇게 여겨야 하는데 좀처럼 약한 내 모습을 떨치기는 쉽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시뮬레이션으로 교회 오고 가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교회에 갈 때 15년 넘게 운전대를 잡은 건 남편이었지만, 나는 운전자 마인드를 장착하고 매의 눈으로 지켜보며 옆자리에 앉아있었던 덕분일까. 생각보다 주행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주말 낮에 특히 막히는 강변북로에서 왕복 2시간을 운전하는 게 곤혹스러웠다. ‘강인한 엄마는 극소수에 불과한 거 아닐까?’라는 의구심까지 드는 순간. 내가 서울로 운전할 수 있음에 감사한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꾸마야. 합창단을 언제까지 할 거야? 엄마가 1년만 해보자고 했는데, 힘들면 그만둬도 돼.”
“엄마가 운전하기 힘드니까 이제 와서 그만두자는 거지?”
아이의 말에 몹시 찔렸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라고 솔선수범으로 아이한테 일깨워줘야 하는데 난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아이한테 엄마가 운전이 서투니까 번거롭게 몇 번 갈아타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 뻔했다. 아이는 그 뒤로 합창단을 포기할 마음이 생겼냐고? 절대 아니다.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지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 아니던가. 처음에 합창단을 1년만 해보자고 합의했는데, 낯가림이 심한 아이도 하나둘 친구가 생기자 이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더라도 계속하고 싶다네.
몸도, 마음도 무겁게 교회를 오가고 있었던 어느 밤, 일기 쓰기와 말씀 묵상 가운데 ‘내 아이를 위해서 고작 이것조차 못하나?’ 싶었다. 아이가 대견하게 아무도 모르는 교회 합창단에 들어가 이제야 적응 중인데 내가 기어이 걸림돌이 되어 훼방을 놓으려고 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여전히 상황은 평일도, 주말에도 아이 라이딩 인생 그대로이다. 그런데 생각을 고쳐먹을 덕분일까. 강변북로를 달리는 기분이 달라졌다. 창밖 너머에 드넓은 한강을 보는 여유가 생기고,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함이 전해졌다. ‘매일 이렇게 한강뷰를 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부러운 마음이 온몸을 감쌀 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말했다.
“우리가 한강뷰 아파트에는 못 살아도 괜찮아. 꾸마 덕분에 매주 이렇게 한강뷰를 보며 달리니까 얼마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