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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민 Jun 04. 2021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의 경고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리뷰



 인도 갠지스강 상류 바기라티강에서 들개가 물에 잠긴 무언가를 먹고 있는 듯한 사진 한 장이 공개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깃덩어리 같아 보였고, 이후 영상 속에서 시신을 식량으로 삼는 들개의 모습이 보였다. 또 다른 사진에선 모래에 묻혀있는 화장된 시신들을 들개들이 파헤치는 모습도 보였다. 그야말로 보고 있기 조차 어려운 처참하고,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미간에 주름이 생기며 사진을 보면서 그에 딸린 기사를 봤다. 인도는 지금도 하루에 수만 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결국 이런 상황에 사망자를 화장하는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기사였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의 최소 단위인 찰나의 순간에 연민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향한 어떤 생각이나 행동은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경쟁이라는 단어 아래 우리는 서로를 짓밟고 올라가야 하는 시스템에 금방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 기나긴 전쟁에 익숙지 않은 녀석들을 사회에서는, 일진, 불량 청소년, 노는 애들이라는 라벨을 붙였고, 그들 나름대로의 경쟁 속에서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반에서는 종종 혈투가 이루어졌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중학교 때 얼굴이 곤죽이 되도록 정신없이 얼굴을 후려치는 녀석의 모습에 반 전체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공감이나, 연민은 배부른 사치였다. 그저 생존이란 단어만 가득 차 있었다. 그 시기는 우연찮게 IMF 시기와 연결되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가드나 글러브 없이, 한 번도 준비하지 못한 사각링 위에 올라가 퇴직을 당했다. 그 해는 어느 해보다 자살하는 이들이 많았고, 타인의 고통에 이 사회는 공감 불능의 상태가 되어 갔다.


 이런 사회를 미리 경험한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150.p


 그리고 그와 같은 이유를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p.151)’이기 때문이라 전한다. 그녀의 책의 전반적인 부분을 통해 끊임없이 말하는 타인에 고통은 때로 너무 멀리 있어 공감하기 어렵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주장한다. 사진이라는 이미지 넘어서의 배제된 이야기와 과정들의 폭력성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p.167)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 준다.


 이제 세상은  번의 클릭과 검색으로 전쟁의 잔혹함과 광기를 쉽게   있다. 그리고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가난과 고통에 처한 세계 곳곳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곳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   사회는 점점 타인의 고통을 향한 방관자가  것이다. 수전 손택의 진심 어린 이야기가 마음 어딘가에 살짝 걸려 있겠지만 그것 역시 언제까지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기에 너무 바쁘고,  고통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치와 경쟁시스템에 존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에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민이 없이 나의 고통에만 매몰되는 삶은 권력의 힘이 조장하는 불안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인간의 실체를 잃어버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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