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진동이 울릴 때, 나의 세계는 무너진다
어린이집에 보낸 지 첫 달, 아이의 코밑은 마를 날이 없었다. ‘어린이집 가면 콧물을 달고 산다’는 선배 엄마들의 말은 괴담이 아니라 예언이었다.
콧물만 나면 다행이었다. 문제는 그 콧물이 열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의 적응기와 나의 복직 적응기가 잔인하게 겹쳐 흐르던 그해 봄, 나의 가장 큰 공포는 귀신도, 업무 실수도 아닌 바로 ‘핸드폰 진동’이었다.
사무실에서 한창 서류와 씨름하고 있을 때,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휴대폰 화면에 어린이집 번호가 뜨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 번호는 백발백중 사망선고와 같았다.
“어머니, 아기가 열이 38.5도까지 올라서요. 해열제를 맘대로 먹일 수도 없고, 긴급 하원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나면 눈앞이 아득해진다. 갓 막내 딱지를 뗀 내게 조퇴는 단순히 퇴근을 일찍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쌓여있는 업무를 누군가에게 떠넘겨야 하는 비굴함이자, ‘이래서 애 엄마는 쓰기 힘들다’는 보이지 않는 편견에 스스로 증거를 보태는 꼴이었다.
하지만 더 비참한 건 그 이후에 이어지는 남편과의 ‘눈치싸움’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전화 왔어. 아기 열난대. 당신 오늘 조퇴 가능해?]
[나 오늘 중요한 과업 있어서 절대 안 돼. 당신은?]
[나도 오늘 회계마감이라 진짜 힘든데...]
서로의 바쁨을 증명하고, 누가 더 ‘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가려내야 하는 그 유치하고 시린 대화들.
도움받을 곳 하나 없는 하늘 아래, 우리 중 한 명은 결국 ‘죄인’이 되어야 했다. 누구의 커리어가 더 귀한지, 누구의 사정이 더 절박한지를 따지는 문자들이 오갈 때마다 부부라는 팀워크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결국 조퇴 가방을 싸는 건 대부분 나였다.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달려가는 길, 아이에 대한 걱정보다 ‘내일 출근해서 동료들에게 뭐라고 사과해야 하나’를 먼저 고민하는 내 모습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당당한 워킹맘이 되어 아이에게 멋진 본보기가 되겠다던 서슬 퍼런 다짐들은 간데없고, 그저 민폐 덩어리가 된 것 같은 자괴감만 남았다.
“미안해 아가, 엄마가 미안해.”
뜨거운 아이의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는 이 말은 아이에게 하는 사과인 동시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보내는 자조 섞인 위로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음 날 아침, 해열제 덕분에 열이 내린 아이가 다시 방긋 웃으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스스한 머리를 묶고 다시 전투화 같은 구두를 신는다. 무너졌다가도 다시 사원증을 목에 거는 것, 비굴해졌다가도 다시 키보드 앞에 앉는 것.
어쩌면 워킹맘의 본보기란 완벽한 커리어와 육아를 해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 무너지면서도 매번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이 지독한 ‘반복’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예정에 없던 진동이 울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문서대기함 화면 위에 나의 하루를 조심스레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