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지나면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매년추석 때 고향친구들과 하던 잘 지내냐고, 이번엔얼굴 볼 수 있냐고 하던 연락이 사라진 것입니다.
'잘 지내냐? 올해 추석 때는 얼굴 좀 보나?ㅎ'
'매번 그렇지 뭐. 갈 일이 있어야지......'
미안할 정도로 명절마다 같은 말을 주고받았습니다.고향친구들과 대면하여 술잔을 기울인 것이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상경하여 홀로 잘 적응하다가도 고향친구들과 연락하여 서울로 친구들이 오기도 하고 제가 가기도 하여 만나는 것은 하나의 낙이자 쉼이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께서는 더 이상 고향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듯 타 지역으로 이주하셨습니다.부모님께서거처를 옮기셨어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친척들을 찾아뵈러 가서 간간이 친구들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결혼 후 명절 때부모님, 처가, 복귀로 고정된 일정을 잡다 보니고향으로 가 누구를 만날 일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들 가정을 꾸리고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습니다. 휴대폰 프로필 사진들은 아이들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근황을 묻는 게 어색할 정도로 서로 이야기를 전할 일이 드물어갔습니다. 명절에나 서로 메시지로 생사(?)를 확인하는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고 매번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서울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저의 삶의 모습은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적당히 일이 있고 만날 사람들이 있으며 여유시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즐깁니다. 하지만 삶의 방향이 같고 이야기를 편히 주고받을 수 있는사람을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잘 맞는 것 같다도 여겨졌던 사이도 어느새삶의 속도와 방향에서 차이가 났습니다.대학의 테두리에서 깨닫지 못했던 서로의 취미나 관심사는 갈수록 확연히 달라졌습니다.어쩌면 여초대학을 다니는 소수의 남학생들이다 보니 그때는 서로를 위해 조금씩 맞춰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래에 대해 갈피를 못 잡다 늦게 대학에 입학한 터라 졸업 후 결혼, 출산과 같은 개인의 가정 대소사 시기도 친구나 동기들과 꽤 달랐습니다. 결정적으로동서남북으로 멀리 나뉜 직장 및 거주지와 일에 대한 태도는평일뿐 아니라 주말의 삶의 모습을갈랐습니다.
미래를 확신할 수 없기에 주위에서는 다들 준비를 합니다. 직장에서 큰일들(?)을 도맡아 하며 업적을 쌓아갑니다. 승진 점수를 챙기고 대학원, 학회 연구를 이어가며 바쁘게 삽니다. 저는 그네들의 삶의 모습을 서울에 짧게 머무는 여행자처럼 낯설게 바라봅니다.
적극적인 생산을 하고 문화를 즐기고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바쁘게 지내는 주변의 풍경 속에서 소극적으로 하루치의 사냥만을 끝내고 집에 와 새끼들을 돌보는 저의 일과는 화려한 서울의 모습에 동떨어져 어색하기조차 합니다.
고향에 살지도, 서울 삶에 적응하지도 않는 저의 모습은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바쁜 도시 속에서 하루하루 존재감 없이 조용히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삶의 책장을 넘겨갑니다. 생각하는 지금이 제일 젊고 에너지가 넘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일에 대한 의욕이나 욕심이 없는 것 또한 하나의 삶의 방식이 아닐까 자위해 봅니다.
고향친구를 만나면 반갑겠지만 그립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서울 친구들을 만나면 즐겁게 이야기하겠지만 헤어짐이 아쉽지는 않습니다. 마치배낭여행 간 타국에서 오랜만에 한국사람을 만나 반가웠지만 담담히 이별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갈길을 갔던 것처럼 저는 서울을조용히여행하는 이방인같이 오늘도 서울에서의 하루를 그렇게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