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코앞에 둔 월요일 기분 좋게 출근을 하는데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났다. 운전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도착 후 살펴보니 트렁크에 각종 물건들이 널브러져 굴러다니고 있었다. 주말에 가족들과 외출한 후 피곤하다고 정리 안 한 흔적들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아니라 금세 정리하고 가방을 메고 계단을 오르는데
찰랑찰랑.
가방에서 낯선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치 파도가 등으로 밀려오는 느낌.
'아, 커피를 안 마셨구나.'
운전하는 동안 텀블러에 들어있는 커피를 대부분 다 마시는데 그날은 차에서 나는 소리에 신경 쓰여 거의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올라가서 천천히 마셔야겠다.'
계단을 오르며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도착해 가방을 열었는데
뜨악!
커피가 가방 안을 유유히 흐르며 구석구석에서 찰랑댔다. 아까 차를 살필 때 가방을 메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평소보다 큰 신체의 움직임에 가방 속에서 텀블러는 엎어졌고 그날따라 뚜껑이 제대로 닫혀있지 않아 녀석은 들어있던 커피를 시원하게 토해냈던 것이다.
하하하.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쓴웃음이 나왔다. 방수가 잘 되어 새지 않은 가방의 특징이 더 큰 참사를 만들었다.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가 가방을 뒤집어 커피를 버리고 물건들을 꺼내 씻었는데 휴대폰은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른 물건들은 표면만 닦으면 되는데 텀블러가 뱉어놓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을 휴대폰은 겉을 닦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 침수 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바로 끄고 말리는 것인데 커피다 보니 확신이 없었다.
물로 씻고 말려?
아니면 그냥 말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후 휴대폰은 두 번 다시 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얇은 휴지와 말린 물티슈로 표면과 각종 홈을 정성스레 닦고가장 양지바른(?) 곳에놓은 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전원을 껐다. 적지 않은 시간 커피를 마셨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 일단 되는대로 백업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바짝 마른 후 죽음에서 돌아와 반짝이며 전원이 들어오는 부활을 기대하였건만 꺼질 때 안녕을 말했던 녀석은 그대로 작별을 고하고 사망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며 몇 시간 동안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도무지 녀석은 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들고 일의 능률이 높아진다는데 휴대폰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주인 커피 몽땅 먹고 튀어버린 녀석 때문에 한동안의 상실감과 허탈함에 휴대폰 없이 살아볼까 생각했지만, 추석을 앞두고 잠수 타면 지금 시기에 쓸데없는 논란이 생길까 봐 바로 다른 휴대폰을 구입했다.
매년 사진을 백업해 두는데 올해는 아직 백업을 안 해두어 데이터 복구 비용을 알아보았다. 다들 비용을 적잖게 불렀다.
"최소 10만 원 이상은 기본으로 들 것 같은데 복구할까?"
"복구 꼭 필요해?"
"2023년 사진 백업을 안 했는데....."
"사진 잘 안 보잖아. 나도 몇 장 있으니까 하지마."
해님은 쿨하게 2023년 기억을 포기했다. 나도 시간도, 돈도 낭비라 생각해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기록은 6년을 사용한 휴대폰에서 사장되었고 난 새 휴대폰의 기능들을 신기해하는 신 문명인이 되었다.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