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상담사 Uni Apr 29. 2020

길에서 만난 그녀의 눈물

애타게 찾던 퍼즐 조각

근처에 볼 일이 있어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정거장에서 내렸다. 환승하면 집 앞에서 내리지만 조금 걷고 싶었다. 길을 걷다 보니 사거리가 나오고 2개의 신호등 중 먼저 초록불로 바뀌는 쪽으로 선택했다. 얼마 못 가, 또 신호등이 나왔다. 바로 건널 것이냐, 더 걷다가 건널 것이냐. 짧은 순간이라도 나는 묻는다. 나에게. 어디로 가고 싶냐고.


 5분 정도의 길도 여행하듯이 걷는다. 매번 익숙한 길도 묻는다. 어디로 가고 싶냐고. 익숙한 길로 갈 때가 많지만, 가끔 새로운 길로, 구석구석 다른 길로도 가본다. 일상의 여행처럼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는 왠지 모를 설레임이 올라온다.


 그날도 그랬다. 아파트 들어가기 전 4번째 마지막 신호등에서도 나에게 물었고, 위쪽의 신호 없는 횡단보도로 향했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자꾸만 뒤에서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겠지 하며 가는데, 또 들렸다. 뒤돌아 봤다가 나 아니면 창피하니까, 그대로 가려는데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역시나 동네의 친한 언니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몇 번을 불렀는데도 그냥 가길래 마지막 한 번 크게 불렀다는 것이다.

 언니와 집 앞까지의 짧은 동행이 시작됐다. 언니는 내게 마침 전화를 하고 싶었었다며 바로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병원에 다녀왔다는 말과 언니 눈의 촉촉함에 심장이 덜컹했다. '언니.. ' 더 묻지는 못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언니 이야기를 들었다.


 자궁에 근종이 생겨서 소개받은 병원에 갔는데 평생 듣지도 못한 말을 의사 선생님께 들었다고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니 그동안 산부인과도 많이 다녔었는데 한 번도 듣지 못한 말.


"자궁이 기형이네요. 생리양도 많고, 빈혈이 심해서 지내기 힘들었을 텐데..."


그 말에 언니는 자기 인생이 이해됐다고 했다. 155cm 정도의 작은 체구에 얼굴이 뽀얗고 아담한 언니. 사람들 눈에 띄게 하려고 빨간 립스틱을 애용하고, 분홍색 리본을 사랑하는 언니. 수학을 좋아해서 정석을 풀며 스트레스를 푸는 언니. 언니는 어렸을 때 사고로 손가락 마디 하나가 짧다. 장애라 생각하지 않고, 늘 당당히 보여주는 언니지만, 마음 한 편에는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모습이 있다. 우리끼리 여행 가면 언니는 늘 먼저 자야 했다. 체력이 딸린다면서 남들만큼 깨어있다가는 힘들어했다. 욕심내서 더 열심히 하고 싶어도 체력에 부딪쳤고, 남들과는 다른 한계점을 깨는 것도 힘에 부쳤었다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실패와 좌절들 속에서 기준점을 낮춰왔다고 했다. 그 뒤에는 늘 자기 비난이 따라왔다.


 그런 언니에게 의사 선생님의 진단은 인생의 먹구름이 싹 걷히는 말이었다. 내가 부족한 탓이 아니라, 엄마 뱃속에서부터 결정된 탓이라고. 선천적인 영향으로 남들보다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는데 자기 탓만 해왔던 게 속상하고, 억울하다고 했다. 억울해서 2주를 울었다고, 언니는 말하며 또 눈물을 흘렸다. 자기가 너무 불쌍했다고... 큰 병이 아니라 다행이다 놀란 내 마음을 쓸어내리며, 언니의 등을 쓰담쓰담 쓸어주고, 안아주었다. 그러라고 오늘 만났던 거였다.

마지막에도 언니는 우리를 챙겨줬다.

"딸 엄마니까 꼭 얘기해 주고 싶었어. 딸들 철분 꼭 잘 챙기고, 생리도 꼭 잘 확인해봐 주고. 그거 너무 중요하다."




  며칠이 흘렀는데도 길에서 만난 언니와의 이 10분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물론, 신체적인 조건으로 모든 이유를 갖다 댈 수 없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살았는데도 막히고, 좌절했던 삶의 중요한 퍼즐 조각 하나를 찾은 언니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다 비슷비슷한 조각들 중에 아무리 찾아도 안 맞던 칸이 딱 맞아떨어지며, 그림이 선명해진 것이다.


 누구나 아무리 찾아도 맞지 않는 인생의 한 칸이 있지 않을까?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겐 특히. 그 빈칸의 한 조각을 찾지 못해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분노하고, 질질 끌려가는 삶을 산다. 언니가 만난 의사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면 좋겠지만, 난 안다. 언니가 어떻게 찾게 됐는지. 오랫동안 그 한 칸을 찾기 위해 부딪쳐 보고, 도전하고, 용기내고, 끝까지 찾으려 했기에 만났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언니의 눈물에는 억울함 51%, 찾았다는 기쁨 49%라 확신한다. 기쁨이 있기에 먹구름이 걷혀간 것이다.


 그 빈칸의 퍼즐 조각을 찾는 순간까지 가 보자. 죽을 때까지도 못 찾는 사람이 수두룩이다. 나를 오롯이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위너 아닐까. 그 지도는 내 안에 있다. 아주 깊숙한 곳에 있어 오래 걸릴 뿐이다. 그때까지 나에게 묻고, 또 묻자.  


'어디로 가고 싶어?'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 되길 잘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