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d Zero 프로젝트 3주 차
저는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내향적이라고 해서 꼭 얌전하고 소심함과 동의어는 아닌데, 그렇게 살아왔어요. 저의 표현을 함에 주저하고, 타이밍을 놓치다 보니 안 하고 얌전하게 있는 것만이 방법이었고, 점점 익숙해졌죠. 더욱이 딸 셋의 첫째인 저를 엄마는 탐탁지 않게 여겼고, 무슨 말만 해도 차가운 시선과 환영받지 못하는 반응이 나오다 보니 원활한 소통은 거의 불가능했어요. 아빠도 밖에서는 사람들을 잘 챙겨주시는 분이지만 집에서는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안 드셔도 화를 버럭버럭 내셨어요. 아빠에게 혼날까 봐 조심하다가 한 번씩 크게 혼이 나면 기가 더 죽어갔죠. 알아요. 저도 엄마로 살아보니, 아이 셋을 키우며 살림하고, 힘든 살림에 부업까지 하셨으니 우울하고 지치셨었을 거란 걸요. 아빠도 맨땅에 헤딩하듯 다섯 식구 먹여 살리느라 회사에서 눈치 보고, 쌓인 스트레스가 많으셨을 거란 걸요. 엄마, 아빠를 이제는 이해하면서도 저 자신이 그런 상황에서 지내느라 어떠했는지가 지금은 중요하니까요. 저를 온전히 만나기 위해서요.
학교에서도 얌전한 아이니 친구도 2~3명의 소수와만 친했고, 존재감이 별로 없는 편이었어요. 집에서도 관심받지 못하는 아이니, 학교나 학원에 가서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그랬던 제게 5학년 때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났어요. 5학년 담임 선생님을 처음 뵙던 날부터 반의 분위기가 달랐어요. 선생님이 되신 지 얼마 안 된 남자 선생님이셨고, 아이들에게 편하게 장난도 쳐 주시고,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이 해 주셨거든요. 그런 데다가 제가 선생님의 비서가 되었어요. 선생님이 수업을 하실 때 소소하게 도와드리고, 챙겨드리는 역할이었죠. 이 때는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 특히 인기 있는 선생님의 비서라니 제 생애 이런 일도 다 있나 싶었어요. 1학기 동안은 햇살이 참 따듯했던 기억이 나고, 수업 끝나고 방과 후에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날이면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서슴없이 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선생님이 편하고, 잘 받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었던 거겠죠.
그렇게 나름 행복한 1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이 다가올 즈음, 청소를 마치고, 칠판 정리를 하고 있었어요. 항상 늦게까지 있는 건 아닌데, 나름 비서라고 역할이 꽤 있었어요. 친구들은 청소 끝나고 먼저 간 상태여서 저도 서두르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어요. 그리고는 제 가까이로 오셔서 정리를 도와주시는가 싶었는데, 저를 뒤에서 안아주셨어요. 워낙 장난을 많이 치셨던 분이라 저도 대수롭지 않았죠. 하지만, 금세 '어, 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뒤에서 안은 상태로 선생님 자리의 의자로 가서 저를 무릎 위에 올려놓으셨죠. 난감하고,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앞문이 벌컥 열렸어요. 누군가는 저의 이 이야기를 듣고 신의 도움이라고도 하더라고요. 앞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더 큰일이 있었을지 모른다고요. 하지만, 저는 그 순간을 신의 버림이라 생각했어요. 잠시 행복했던 저를 다시 나락으로 밀어버리는 것처럼요. 쓰레기통을 버리러 갔던 남학생이 돌아와서 앞문을 낚아채듯 세게 열었고, 저는 그 순간 교실 앞 중간쯤으로 떠밀려 서 있었어요. 당황한 선생님이 앞으로 밀어버리신 거죠. 저를요. 그 뒤부터는 기억이 안 나요. 어떻게 상황이 마무리되고,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왔는지요. 다만, 다음 날부터 그 남학생이 무척 신경이 쓰였고, 선생님 앞에서 웃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만 남아 있어요. 그 남학생이 이상한 소문을 내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어요.
"쟤랑 선생님이랑 이상했어. 그렇고 그렇대~~"
등등의 말들에 발목이 잡히면서 광명 속 짧았던 몇 달은 막을 내렸어요. 그 남학생이 아무 말하지 않았는지 상황이 악화되는 일은 없었지만 저 혼자 그 성에 갇혀 지내게 됐어요. 저 역시 이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말해서 도움을 받았어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떠올릴 수 없었어요. 제가 유일하게 편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 선생님이셨었으니까요. 이제는 그 한 사람조차 사라져 버린 거죠. 사춘기까지 겹치면서 저를 생각할 때 이기적인 아이, 나쁜 아이, 이상한 아이, 이용당하는 아이라는 벽을 쌓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 버렸어요. 집에 돌아오면 방문을 잠그고 방의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릎을 잡고, 웅크리고 있었어요. 아주 오랫동안요..
여기까지는 상담을 받으면서 선생님에 대한 분노도 폭발해 보고, 울기도 많이 울고, 저에게 괜찮다고, 아무 일 아니라고도 말해줬던 장면이에요. 그저 제 기억 속 여러 미해결 과제들 중 하나였죠. 그런데, 불현듯 떠오른 이 장면에서 이 생각이 들었어요.
괜찮다고는 해 줬지만, 여전히 저를 깨진 항아리라 보고 있었더라고요..
저란 사람에게 아무 잘못이 없고, 온전하다는 것을 믿어주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아무리 저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별 짓을 다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었던 거예요. 그 순간, 높이 쌓아 올린 성벽 안에 들어가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 아이에게 말해 줄 수 있었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 선생님 잘못이야. 너는 도움을 받았어야 했어. 너는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여태 그 말을 못 하고 온 몸으로 버텨내고 있었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까 봐. 이제, 내가 믿어줄게. 너는 아무 잘못 없다고. 너는 온전하다고. 존재로 존중받아야 하고, 소중하다고. 내가 믿어!!! 너무 늦었지? 너무 돌고 돌아왔지? 미안해, 너무 오래 그 마음 못 알아줘서.."
이 말을 해 주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내내 찾아 헤매던 퍼즐 한 조각을 드디어 맞춘 듯이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더라고요. 더 이상 나를 이상하고 잘못만 하는 사람이라 보지 않으니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행동을 곱씹으면서 반추할 필요도 없었어요. 선생님에 대한 분노와 별개로 제 마음은 단단해졌고, 세상과 나를 가로막았던 높은 성벽이 이제는 저의 보호막이 되었어요.
이제야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