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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Mind Zero 프로젝트 3주 차

by 마음상담사 Uni

3년 전에 사랑에 관한 주제로 강의를 해야 할 때, 'Love myself, but how?' 제목으로 콘텐츠를 만들었어요. 지금까지도 제가 아끼는 강의인데요. 이 강의에서 저의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로 저 역시 어떻게 나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려드려요. 결국은 선생님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듣는 분들이 다들 놀라세요. 그럼에도 저는 이 이야기를 피하지 않아요. 성추행이라는 단어가 금기시되거나 피해 종류에서 다른 색깔로 구분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요. 한 가지 더, 성추행이란 사건에서 끝나지 않고 그 이후 한 사람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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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의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저의 정체성에 심하게 타격을 받았고, 그즈음부터 화장실에 제대로 가질 못했어요. 보름에 한두 번 정도 갈까 말까였으니 큰 일을 보기도 힘들었고, 그나마도 일을 보게 되면 변기가 막히는 상황이 반복됐어요. 부모님은 변비가 심해졌다며 알로에, 야채 등을 챙겨주신 것 같은데, 효과는 없었어요. 몇 년을 그랬죠. 몸의 이상이 아니라 마음이 닫히면서 제대로 작동하질 못했어요. 방의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참아냈어요. 그때는 선생님과의 일이 관련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십 년도 훨씬 지나 상담을 받으면서 갑자기 터진 울음에 섞여 올라온 목소리로 알았어요.


"거기에 그렇게 앉아있기 싫었어요... 다시는, 다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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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앉아서 큰 일을 보는 상황이 제게는 그날의 트라우마처럼 떠올랐고, 거부감과 두려움에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여태 모르고 살아왔었어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감히 선생님의 잘못이라는 생각도 못 하고, 스스로 나쁜 아이라는 생각으로 저를 벌주듯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참고 참다가 속옷에라도 묻으면 나에게 냄새나지 않을까, 사람들이 나를 놀리고 싫어하지 않을까 또 두려웠어요. 화장실에 제대로 가지 못하는 행동은 습관처럼 굳어졌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됐어요. 중학생 교실은 도시락도 까먹고, 학생들 땀과 사춘기 특유의 냄새들이 나잖아요. 누가 지나가면서 "우리 반 이상한 냄새나지 않냐?", "무슨 냄새야?"라는 이야기만 해도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 때문인가 봐..'


성인이 되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만 생기면 바로 직결탄으로 떠오르는 내 탓이라는 생각이 여기서 굳어졌었나 봐요. 이 생각만 떠오르면 바로, 온몸이 굳어졌어요. 그때부터는 머릿속에 위험 경보령이 발동하면서 사람들 옆에 가지 않으려 하고, 숨에도 냄새가 새어나갈까 온 몸의 구멍을 막아버리는 느낌으로 보내게 돼요. 교실 안의 투명인간처럼, 나 스스로를 열심히 지워내듯이요. 방 한 구석처럼 교실 저의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교과서만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가끔 착한 친구들이 제게 손을 내밀어도 밀어냈어요. 나의 실체를 알게 돼서 실망하는 모습이 너무 두려웠나 봐요. 어느 누구도 제게 손가락질하고, 이상한 아이다, 냄새난다고 이야기한 적 없음에도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될까 봐 저를 철저히 단속했나 봐요.


나름 살려고 했던 건지, 공부 하나는 죽어라 열심히 했지만 결국 부모님, 학교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만년 2등 신세에, 월등한 동갑내기 사촌들과도 비교가 안 됐고, 잠깐씩 기대를 받았다가도 운이 좋았을 뿐이란 평가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신체, 감정, 욕구 모두 극한 상태까지 막아내다가 중 3 말이 돼서야 제대로 사춘기가 온 건지 반항을 시작하며 달라졌어요. 하지만, 5년여 동안 저의 뇌 프로그램에는 '나는 나쁜 아이야, 냄새나는 아이야, 사람들이 싫어할 거야, 잘못했다고 수군댈 거야, 나를 미워할 거야...' 뇌 회로가 너무도 두터워졌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결론은 나를 향한 비난이었으니까요.


5학년 때 제 인생의 단 하루,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 이후 저는 제 자신을 탓하고 비난하며 세상이 무서워 눈치를 보며 살아왔음을 이제야 이해하게 됐어요. 어느 때라도 기회만 되면 상담을 받고, 괴로워도 마음 보기를 포기하지 않고 돌아왔더니 힘이 쌓였더라고요. 상담사로서 어쩌면 당연한 시간이겠지만 해도 해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 같았거든요. 결국은 그날의 일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뒤에 주렁주렁 딸려 올라온 저의 모습들이 보였어요. 왜 그렇게도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지, 애써 분석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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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밑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마음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소녀는 방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표정과 목소리, 손짓에 온갖 레이다망을 열고 있었어요. 순간 날아오는 한 방들에 제대로 막아낼 방법도 모른 채 두려워도 가야 하니까 나와요. 방에 돌아와서야 총알이 박혔는지, 상처가 났는지 샅샅이 뒤지고 오늘도 제가 잘못해서 생긴 것들이라며 자신을 혼내요. 내일은 더 잘하라면서요.


"불쌍해요..."


내담자분들이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에요. 저도요. 그 아이 혼자 살아보겠다고 고군분투했던 모습이 안쓰럽고 불쌍해요. 그리고, 곧 뒤따라 올라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곳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고맙고 장하다고요. 그 덕분에 이제 나를 더, 더 절절히 사랑하게 되었다고요. 두터워진 뇌 회로 옆에 나를 온전히 돌봐주고, 사랑하는 경로를 몇 배 더 딴딴히 만들어 놓을 거예요.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 않아요. 나에게 좋은 선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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