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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동안 시를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by 아라

아이가 네 살 때 처음 알게 된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읽은 날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섬광처럼 다가온 작은 깨달음의 순간이었습니다.


집에 뛰어들어와 타이핑을 하고 출력을 해

냉장고에 붙였습니다.

그 날부터 15년 동안 냉장고에 붙어 있었고,

지금도 붙어 있습니다.


아이 키우며

흔들릴 때마다 냉장고 앞으로 갔습니다.

이 시 한 편을 붙들고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이가 스무 살이 된 올해 1월 1일에도

냉장고 앞으로 갔습니다.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울컥하더라고요.

또 새롭게 발견한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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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오타가 있다는 걸 그날에야 알았습니다. ㅎㅎㅎ

이번에는 오타 없이 브런치에 걸어 둡니다.




무기 감옥에서 살아나올 때

이번 생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혁명가로서 철저하고 강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허약하고 결함이 많아서이다


하지만 기나긴 감옥 독방에서

나는 너무 아이를 갖고 싶어서

수많은 상상과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

그 모든 씨앗들이 심겨져 있을 것이기에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다’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유일한 자신의 삶조차 자기답게 살아가지 못한 자가

미래에서 온 아이의 삶을 함부로 손대려 하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기에


나는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자 안달하기보다

먼저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고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행여 내가 후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면서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것이었다


- 박노해,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이 시에 얽힌 이야기는 여기 있어요 ^^

https://brunch.co.kr/@arachi15/89




주1> 박노해,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2010, 느린걸음.

표지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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