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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진짜 놀이'를 알지

by 아라

“엄마! 나는 5가지 빼고 다 해 봤어!”


250520 12살-50가지.png



아이야.

엄마가 저녁 식탁을 차리고 있던 어느 날, 네가 외쳤어.

엄마 책상에서 〈아이가 12살이 되기 전 해봐야 할 50가지> 목록을 발견하고는 네가 해 본 것들을 하나한 세어 보고는 자랑스럽게 외친 거지. ㅎㅎㅎ


엄마도 이 목록을 보고 신기했어. 네가 어릴 때부터 야외에서 놀았던 놀이들, 공동육아방과후에서 형, 언니, 동생들과 함께 했던 놀이들, 가족끼리 또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캠핑 다니며 했던, 그 이름도 없는 놀이들이 여기에 잔뜩 적혀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너는 정말 놀고 놀고 또 놀면서 지냈나 봐.

어린이집에서는 오전엔 나들이, 오후엔 마당 놀이, 온 종일 뛰어 놀았고,

초등학교 땐 학교가 끝나면 공동육아방과후에서 엄마가 퇴근해 올 때까지 숙제만 해 놓고는 내내 놀았지.

아마 12년 인생(?) 동안 잠자는 시간 외에 가장 많이 한 일이 노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너를 보면 정말 ‘놀기 위해 세상에 온 것’(주1) 같았어.

놀아도 놀아도 계속 놀고 싶다는 너희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계절과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자랐어. 아마 실내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을 거야. 네가 학교 가기 전까지 다닌 어린이집은 매일 오전 시간은 온전히 자연 속으로 나들이를 가는 곳이었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들이를 나갔지. 낮잠 자고 일어난 오후가 되면 이번엔 마당에 나와 마당놀이, 모래놀이를 했지.


그러고 보면 네가 다녔던 어린이집에는 플라스틱 놀잇감은 거의 없었는데, 사실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도 않았어. 너희들이 가장 좋아한 놀잇감은 모래와 물이었거든. 하원하려고 데리러 가면 대부분 마당에서 놀고 있었지. 직접 나들이 다니면서 주워 온 돌멩이, 나뭇가지들, 집에서는 안 쓰는 보자기, 못 쓰게 된 냄비, 후라이팬, 숟가락 같은 진짜 살림살이들도 너희가 좋아하는 놀잇감이었어. 너희들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신나게 놀았지. 한 쪽에서는 모래 놀이가 한창이고 한 쪽에서는 뛰어 다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세발 자전거를 와다다다 굴리고 있고... 언제나 널 데리러 가면 아이들은 모두 마당에 나와 무언가를 하고 있었어. 그 때 너희들의 자유로운 몸짓, 재잘대는 이야기 소리, 깔깔대던 웃음 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엄마나 아빠가 데리러 온 줄 모르고 놀고 있는 아이, 집에 안 가겠다고 선생님 등 뒤에 숨는 아이, 더 놀다 가겠다고 울거나 떼쓰는 너희들과 늘 실랑이가 벌어졌지. ㅎㅎㅎ


초등학교에 가서도 학교가 끝나면 공동육아방과후에서 내내 놀았지. 숙제하는 시간도 있고 요일마다 주력하는 활동이 있기는 했어. 도서관 나들이, 공동체 놀이, 먼나들이, 손작업 등등. 그럼에도 너희들의 많은 시간은 ‘자유 놀이’로 채워졌어. 많지 않은 학교 숙제를 마치면 형, 언니들과 놀고 또래와 놀고 동생들과 놀고. 프로그램도 놀이고, 자유 시간도 대부분은 ‘자유 놀이’로 채워졌지. ㅎㅎㅎ


나무위에 올라간아이들(파란하늘).png 나들이길, 나무 위에서 잠시 쉬는 아이들 ⓒ 방과후.


너희들은 툭 하면 "내 놀이할 사람!" 외치며 같이 놀 친구들을 찾아다녔어. 또 아이들은 무슨 놀이인지도 모르고 "나!!" 외치면서 합류했고... 엄마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는 설명을 너희끼리 주고 받으며 대화하는 것도 신기했고 '저런 게 놀이야?' 싶은 놀이들을 때로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때로는 깔깔거리는 것도 신기했어.


너희들은 놀이에 ‘진심’이었어.

텃밭에서 씨앗 심고 물 주는 것도 놀이였고 새싹이 나오면 갑자기 종이를 가지고 나와 흙 위에 털퍼덕 앉아서 새싹 나온 기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놀이였어.

봄이 오면 자주 가던 OO산 연못에서는 도룡뇽과 개구리알을 찾고 관찰하며 놀았지.

캠핑을 가면 나뭇가지를 주우러 다니는 것도 놀이였고 도토리나 나무 열매를 주우러 다니는 것도 놀이였지. 어른들이 모래 바닥에 불을 피우고 있으면 옆에 와서 너희들도 작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똑같이 불을 피웠어. 불 피우기에 안전한 공간이면 어른들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너희들의 시도를 못 하게 막지는 않았어. 극단적 사고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위험한 일도 해 보아야 스스로 조절하는 힘도 갖추게 되니까. 물이 있는 곳에 가면 갖가지 모양과 색깔의 돌멩이를 주우러 다니는 것도 놀이였고 물수제비만으로도 몇 시간을 놀았지.

2017-17) 보트.jpg 계곡에서 배타는 아이들 ⓒ 직접 촬영.


공기를 하고 싶은데 공기가 없으면 공기놀이할 돌을 주우러 다니는 것부터 놀이였어. 병원 놀이를 하려면 처방전과 약봉지를 만드는 것부터가 놀이의 시작이었어. 그런 것에 ‘전 놀이’(=놀이를 준비하는 놀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엄마는 지금의 일터에 와서야 알게 되었지. 어떤 날은 준비만 실컷 하고 놀이를 시작도 못한 채 마실을 끝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너희들은 즐겁기만 했어. 그것도 다 놀이였으니까.


그런 너희들을 지켜 보면서 엄마도 조금씩 놀이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 같다.

너희들에게 놀이는 본능이었어. '호모 루덴스'라는 말 들어 봤어? 네덜란드의 철학자였던 요한 하위장아가 정의했는데,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야. ‘인간과 동물에게 동시에 적용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어내기처럼 중요한 제3의 기능이 있으니, 곧 놀이하기이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도구의 인간) 바로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주2) 그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것들은 ‘호모 루덴스의 충동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했어. 그래서 본능에 가까운 놀이 대신 어릴 때부터 4세 고시, 7세 고시(주3) 준비하는 아이들을 영상으로 보았을 때 무척 충격적이었고 마음이 아팠어. “영어유치원 10곳이 생기면 소아정신과 1곳이 늘어난다는 말은 소아정신과 의사들끼리 흔히 하는 농담"(주4)이라는 서천석 선생님 말씀이 사실이구나 싶었어. ㅠ


얘기가 옆으로 샜네. 엄마는 너희들을 보면서 늘 감탄했어. 너희들은 어떤 공간에 있든, 놀잇감이 있든 없든 놀 수 있었거든. 무엇이든 다 놀이가 될 수 있었어.


넌 아주 어릴 때부터 노는 데는 도가 튼 아이였어. 아무런 장난감이 없어도 놀 수 있는 재주가 있었으니까. 어느 명절이었던가? 할머니 댁에 놀잇감이라고는 없었지. 심심하니까 놀아 달라, 동영상 보여 달라며 사촌 동생이 어른들을 조르기 시작했어. 그러자 너는 갑자기 옷가방을 열어 옷을 몽땅 꺼냈어. 하룻밤 잘 때 입으려고 가져간 옷가지를 거실에 모두 꺼내 늘어놓더니 이 옷들은 징검다리고, 마룻바닥은 물이라며 거길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징검다리 놀이'를 시작했어. 곧 동생들도 금방 네가 만들어낸 놀이에 합류했어. 징검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물에 뛰어 들어 수영도 하고 그러다 물이 갑자기 깊어 빠졌다면서 구해달라고 꺅꺅거리기도 하고, 지진이 일어났다며 징검다리 위치를 바꾸고... 늘어 놓은 옷 몇 벌로도 한참을 재미나게 놀더라.


또 놀이에서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어.

가끔 아마(=부모)들 중에는 좀 더 그럴 듯한 프로그램이나 활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저렇게 제목도 없는 놀이만 되풀이해서 하는 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냐고 묻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이 알려 주셨어.

너희가 직접 선택하거나 만든 놀이가 ‘자유 놀이’이고 그렇게 스스로 선택한 것이 ‘진짜 놀이’라고. 놀이의 첫째 조건은 자발성이라고. 부모가 권한 게 아니고 네가 직접 선택한 것이 진짜 놀이고 부모나 어른이 앞에서 이끌어가지 않고 스스로 주도해 노는 것이 진짜 놀이라는 것을 엄마도 너와 함께 배웠다. 자발성, 선택권, 주도성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어. 이렇게 보면 프로그램이 시간표에 따라 정해져 있는 ‘놀이학교’는 ‘진짜 놀이’가 아니지. 앞에서 어른이 이끌어가는 놀이는 레크레이션일지 모르지만, ‘진짜 놀이’는 아니지. 놀이 키트를 주고 그걸 완성하면 끝나는 것은 '진짜 놀이'는 아닌 것 같다.


아이야.

너는 12년 내내 이렇게 소중한 자유 놀이, ‘진짜 놀이’를 하면서 자랐어.


너희에게 놀이는 본능이었을 뿐만 아니라, 놀이를 통해 모든 것을 배우고 있었어.

과학 시간에 배우는 씨앗, 떡잎, 꽃, 열매... 너희들은 매일 나들이를 다니면서 학교도 가기도 전에 모두 알아 버렸어. 계절마다 피는 꽃도 아는 걸. 텃밭에 새싹이 난 기념으로 그림그리는 건 그대로 미술 시간이었어. 공기돌 찾고 줍고 놀면서, 시장놀이 때 쿠폰으로 물건 사고 팔면서 숫자도 저절로 익혔어. 같이 긴줄넘기하는 시간은 줄을 넘는 신체 활동을 하는 체육시간이었어. 그 뿐 아니라 협동의 시간이기도 했어.

긴줄넘기 함께 할 친구를 모으면서 너희들은 설득의 기술을 익혔을 거야. 너희들끼리 목표를 정해 긴줄넘기 10개를 성공할 때까지 끝까지 뛰고 또 뛰었던 건 목표를 향해 끈기 있게 뛰어 보는 연습이었을 거야.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된다는 것이 뼛속 깊이에 새겨졌을 거야.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을 때 느꼈던 기쁨은 성취의 기쁨을 알게 하는 경험이었을 거야. 그 때 부둥켜 안고 팔짝 팔짝 뛰었던 순간은 함께 하는 공동체의 기쁨, '커뮤니타스'의 기쁨을 느끼게 했을 거야.


놀고 또 노느라 때로는 공부는 뒷전일 때가 많았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믿는 게 뭔지 아니?

이 놀이들을 하면서 했던 스스로 만들어 즐겁게 해냈던 경험들, 이 놀이들을 하면서 친구들과 나누었던 관계들, 놀이 속에 숨어 있던 삶의 기술들, 그 모든 것들은 네 기억에서 지워진다고 해도 너의 세포와 너의 정신 속에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을 거라는 거야. 몸으로 놀면서 얻은 자발성, 주도성, 끈기, 성취감, 절정의 기쁨들이 너에게는 새겨져 있단다. 이렇게 네가 놀면서 키워 온 힘들이 그동안 너를 자라게 했고 또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힘으로 쓰이게 되리라는 것을 엄마는 굳게 믿는다. 그게 놀이의 힘일 거야.


그러니 아이야. 너도 너의 세포와 근육과 정신에 새겨진 너의 힘을 굳게 믿어 보렴.


어려서 했던 놀이를 돌이켜보면 땅에 그어진 금을 밟아 죽고 사는 일을 참 여러 번 겪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실패와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고 다음 판에 다시 살아나 실패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경험을 쌓아 가는데, 그러한 실패의 경험이 어른이 되었을 때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반드시 쓰인다. (주5)


오늘도 너를 응원하는 엄마가.




※ 주1: 편해문,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 주2: 김동주 기자, "호모 루덴스", 부산일보, 2022. 8. 22.

※ 주3: 2025년 2월 방영된 KBS ‘추적 60분: 7세 고시,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에서 언급된 용어로, 영유아기 영어 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시험을 의미함.

※ 주4: 김승현, "영어유치원, ‘적기의 성장’ 희생시켜 득보다 실", 경향신문, 2012.01.09.,

※ 주5: 편해문,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오늘도 글에 머물러 주신 모든 글벗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아라 작가 연재글]

수, 일: 스무 살이 된 아이에게 1 https://brunch.co.kr/brunchbook/rewrite-being20

월: 5시, 책이 나를 깨우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ookswakeme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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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나의 일, 나의 삶 https://brunch.co.kr/brunchbook/workis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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