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배운 것
아이야.
너는 어릴 때 오전 시간을 내내 야외 나들이로 보냈어.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해가 뜨거운 날에도 매일 매일 나들이를 다녔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온도와 습도, 바람의 결을 느끼고, 풀과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았지. 온몸으로 내리쬐는 햇살과 몸을 스쳐 가는 바람과 비와 눈, 그것들이 보내는 온도와 습도, 그리고 손잡은 친구의 체온을 온 몸으로 느꼈지.
나들잇길에 만나는 풀과 나무와 꽃들, 곤충과 작은 동물들을 보고 듣고 만졌어. 봄에는 아름드리나무를 껴안고서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가 나는지 조용히 귀 기울여보고 여름이면 가슴팍에 매미 허물을 브로치처럼 달아 보았지. 가을이면 낙엽을 모아 멋진 만다라를 만들고 눈이 오는 겨울이면 눈에 등을 대고 누워 팔을 저으며 천사가 되었지.
누군가는 매일 똑같은 나들이, 매일 그렇고 그런 자유 놀이가 뭐 그리 큰 의미가 있냐고, 그 시간에 미래를 위해서 뭔가를 배우는 게 낫다고도 하지만 천만에. 자연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긴 어렵지.
자연과 세상은 연결되어 있어. 세상은 결코 자연의 순환을 거스를 수 없거든. 계절과 절기에 따라 태양의 고도가 바뀌고 바람의 온도와 습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하루하루가 같지 않은 새로운 날이라는 걸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 바깥 공기만큼 너희에게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건 없어.
늘 자연 속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햇빛이 뜨거운 날에도 다녔던 그 경험, 그게 바로 매일 매일의 탐험이었어.
아이야.
네가 6살 때부터 우리 가족들은 주말이면 캠핑, 그것도 거의 야생 캠핑을 내내 다녔잖아.
너는 이미 텐트도 칠 줄 알지. 텐트를 치려면 먼저 땅을 잘 골라야 해. 안 그러면 발이 높고 머리가 아래로 향한 채 잠을 자야 할 수도 있으니까. 땅을 잘 고르지 않으면 돌 때문에 등이 배겨 잠을 편히 자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ㅎㅎㅎ 땅을 고르고 위치를 대략 잡은 후 먼저 방수포를 깔지. 그 위에 텐트를 펼치고 폴대를 끼워 텐트를 세우지. 마지막으로 사각 텐트의 네 귀퉁이를 땅에 단단히 고정하기 위해 망치로 팩을 박아야 하지. 텐트를 치고 나면 그 위에 햇빛과 비를 조금이나마 막아 줄 수 있는 타프를 치지. 타프를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도록 팽팽하게 각을 잡아 치고 정확한 위치에 팩을 박는 건 아무리 여러 번 해 봐도 어려운 일 같아. 그치? ㅎㅎㅎ
너는 이미 불도 피울 줄 알지.
캠핑장 도착해 불 피울 때가 되면 누군가 말하지. "얘들아, 나뭇가지 모으러 가자!" 그러면 너희들은 신나서 따라 나섰잖아. 우리는 함께 주변의 풀숲을 다니며 잘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으지. 불쏘시개가 될 나뭇가지를 많이 모으면 불 피울 때 아주 유용하니까. 가끔 큰 비와 눈 또는 번개 때문에 부러진, 굵은 나무가 쓰러져 말라 있으면 큰 횡재야. 어깨에 메고 질질 끌고 오기도 해. 톱으로 자르기만 하면 훌륭한 장작이 되니까. 솔잎은 순식간에 타들어가지만 최고의 불쏘시개잖아.
솔잎, 나뭇가지, 장작을 잔뜩 모아 오면, 화로에 불쏘시개와 장작을 차례로 넣지. 그리고는 불쏘시개에 불을 붙여. 토치로 속 시원하게 불을 붙일 수도 있고. 불이 꺼지려고 하면 우리는 오직 입으로 또는 오직 부채 바람만으로 불을 정성껏 되살리곤 했어. 오직 산소 공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꺼져 가던 불이 다시 타오를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야.
불 속에는 은박지에 싼 고구마를 넣어 두지. 너희들이 젤 좋아하는 건 달고나와 마시멜로! 마시멜로는 절대 쇠젓가락에 꽂으면 안 되는 걸 너희들은 이미 알지. 금방 뜨거워져서 손에 들고 있기가 힘드니까, 마시멜로만큼은 꼭 나무젓가락에 꽂아야 해. 너희들은 옹기종기 모여 가장 맛있는 상태의 마시멜로를 먹기 위해 적정한 불과의 거리, 적절한 굽기 시간을 실험하며 정성껏 마시멜로를 구워.
아이야. 기억나지?
우리는 바람이 많이 부는 날 텐트가 무너지는 것도 경험했고 억수 같이 비가 오는 날에 비를 맞아 가며 또는 비를 피해 가며 불편함도 견뎠어.
우리가 한 섬으로 여행을 떠난 날, 가는 바닷가마다 ‘야영 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어. 그 날 우리는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한 폐가의 마당에 텐트를 치게 되었어. 우리는 거미줄이 쳐져 있던 폐가에도 들어갔다 나왔지. 오옷! 고기 기름을 받으면 좋을 멀쩡하게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종이컵 득템! 귀신이 나왔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귀신은 나오지 않았어. ㅎㅎㅎ
그 날 그 폐가의 마당에서, 풀을 헤치고 땅을 골라 우리는 텐트를 쳤어. 그 날, 네가 설레는 표정으로 그러더라.
“엄마, 우리 꼭 탐험 떠나온 것 같아!”
생각하니 그 날 뿐이 아니었어.
우리 단둘이 제주도에 간 적 있잖아. 우리는 산 중턱에 있는 휴양림을 찾아가는 길이었어. 그 날 따라 안개가 자욱했어. 그렇게 지독한 안개는 엄마에게는 처음이었어. 10미터 앞도 보이질 않았거든. 다른 차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 그렇게 짙은 안개가 내려 앉은 숲속 사이 길을 운전하며 엄마는 '이 길이 맞나?' 의심 반, '앞이 왜 이렇게 안 보이는 거야?' 불안 반, 잔뜩 긴장한 채 운전대를 잡고 있었어. 그런데 그렇게 경직된 채 운전대를 꼭 잡은 엄마 옆에 앉은 네가 말했어.
"엄마, 나 지금 마법 속으로 들어가는 해리포터된 것 같아!"
아이야.
엄마는 그때 어른인 엄마보다 네가 강하다는 걸 느꼈어.
엄마는 어른이고 넌 아이였잖아. 그럼에도 엄마보다 네가 용감했어.
세상의 위험과 해결책들을 많이 아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너를 보면서 배웠다.
그렇게 세상을 탐험하는 법을 엄마는 너를 보면서 너에게서 배웠단다.
아이야.
엄마의 첫 안식월 기념으로, 우리 둘이 미국에 한 달 동안 여행 다녀온 적 있잖아.
우리의 여정에는 미국의 최남단 도시, 헤밍웨이가 마지막 삶을 보냈다는 도시, 날씨가 좋은 날은 쿠바가 보인다는 바닷가 도시, 키웨스트가 포함되어 있었어. 우리는 플로리다에서 차를 렌트해 키웨스트로 떠났지. 바다 위에 거의 다리로 되어 있던 바닷길을 따라 300키로를 운전해야 하는 여정. 간간히 마을이 나타날 뿐, 가는 길은 내내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어. 바다 위를 오직 우리 둘이 달리는 기분이었지. 좋기도 하고 자유로움도 느꼈지만 때때로 엄마는 두려움이 떠오르는 것도 느꼈어.
엄마가 너랑 그 곳을 찾아갈 거라고 했을 때, 사실은 많은 이들이 말렸었거든. 보통 미국 여행갈 때 많이 가는 대도시 관광지가 아니니까. 낯선 곳이고 너무 먼 곳이고 긴 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곳이니까. 성인 여럿이 가는 것도 아니고, 큰 아이를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듬직한 아들을 데려가는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열두 살된, 키는 열두 살보다도 작은 딸 아이 하나를 달랑 데리고 가는 여행이니까, 안전한 곳으로 가야지, 라고 했어. 그럼에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네 덕분이었어. 너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찾아볼 수가 없었거든. 너에게는 설렘과 기대만이 가득했거든. 엄마는 너를 보면서 용기를 낼 수 있었어.
그렇게 몇 시간을 똑같은 바닷길을 달리고 달려 도착한 곳, 키웨스트!
맑은 날이었지만 눈이 나빠서인지 쿠바가 보이지는 않았어. ㅎㅎㅎ 우리는 기쁨에 들떠 서던모스트 포인트에서 함께 사진을 찍고 함께 눈이 빠져라 쿠바를 찾으며 바다를 보고 또 보았어.
해가 지려는 바닷가에 앉아 손을 꼭 잡고 "아이야, 너무 좋다!" "엄마, 너무 좋아!" 하면서 바다를 보고 또 보았어. 우리는 발길 닿는 곳으로 가면서 그 모든 곳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어. 헤밍웨이가 다녔다던 술집에서 밥을 먹었고 인도를 자유롭게 활보하던 예쁜 닭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어. 너는 그곳에서도 고양이만 보면 우리집 고양이들 잘 있겠지, 하면서 사진을 찍었어. 파란 하늘과 바다를 보고 또 보았어.
아이야. 엄마는 너와 단 둘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키웨스트로 떠났던 그 날의 여행을 잊을 수가 없다. 모두가 말렸던 그 여행을 감행한 것이 너무나 뿌듯했어. 모두가 아직 어린 아이와 여행할 땐 안전이 보장된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음에도 감행한 곳이기 때문일 거야. 아마 긴 시간을 달리고 달린 끝에 도착했기 때문일 거야. 낯섬과 두려움과 불안을 견딘 끝에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일 거야.
그 날은 엄마 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절정의 순간이었을 거야!
아이야. 네 덕분에 엄마는 기쁨과 절정의 순간, 경탄의 순간을 맛볼 수 있었어.
아이야.
탐험은 그렇게 하는 거더구나!
어디든 두려움 없이 떠나면 되는 거더라고.
그저 낯선 곳으로 한 발 내디디면 되는 거더라고.
위험과 안전을 견주기 전에
마음이 가는 곳을 똑바로 바라보며 직진하면 된다는 것을 너에게 배웠어.
엄마는 그렇게 너에게서 탐험하는 법을 배웠다.
너에게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탐험의 경험이 새겨져 있지. 그러니 스무 살이 된 아이야.
이제 세상으로 마음껏 탐험을 떠나 보렴.
너 자신을 마음껏 탐험해 보렴.
엄마도 네가 가르쳐 준대로 그리 살려고.
엄마에게 큰 배움을 준 아이야. 정말 고맙다.
표지 이미지> 2018, 키웨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