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배운 것
아이야.
네가 처음으로 똥침을 날린 날, 기억나니?
초등학교 2학년 쯤이었을 거야.
어느 날, 약속이 있어 우리집 근처에 들르셨다가 하룻밤 주무시고 가신다며 할머니가 오셨어. 우린 밤늦게 귀가하는 아빠를 '거실행' 보내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어. 너를 가운데 두고 엄마, 너, 할머니 이렇게 누웠지.
자려고 누웠는데 역시나 너는 그 날도 재잘재잘 얘기를 시작했어.
- 아이: 엄마! 오늘 ㄱㄱ공원으로 나들이 갔다가 달리기를 했거든? 근데 거의 끝에까지 왔는데 OO이가 나를 밀고 먼저 들어갔어! 질 것 같으니까 그런 거잖아. 나빴어!
- 엄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 아이: 엄마는 지금 누구 엄마야?
자려고 불을 껐지만 삐죽삐죽 하는 네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어.
'아차!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데, 할머니가 딱 한 마디 하셨어.
“저런 저런. 속상했겠네. 오늘 꿈 속에서는 그 녀석한테 가서 똥침이나 한 대 놓아 줄까?”
그런데 네가 갑자기 푸하하하, 너무나 호탕하게 웃는 거야.
"엉! 나 똥침해 줄 거야!"
그 한 마디에 네 감정이 순식간에 바뀌는 걸 보았어.
거짓말같이 속상했던 감정을 훅 날려버렸다는 걸 느꼈어.
아이야.
엄마는 그 날, 할머니에게 그리고 너에게
미움이라는 감정을 날려버릴 수 있는 '비법'을 하나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도 그 날부터 똥침을 연습하기 시작했단다.
엄마에게 찾아오는 미움이라는 감정을 똥침에 실어서 날려 보내는 연습 말이야.
너에게 지금쯤은 고백해도 괜찮겠지?
공동육아하면서 그맘 때쯤, 너를 그리고 여러 아이들을 번갈아 따돌리기도 했던 친구가 있었잖아.
사실은 엄마에게 한 동안 그 친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어.
엄마는 당시 교육이사였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했어. 엄마의 마음은 덮어둔 채 함께 해결해 나가는 데 집중했어.
다른 엄마들과 그리고 선생님들과 함께 평화교육과 학교 폭력을 공부했지.
공부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해결책들을 찾아 시도해 보기 시작했어.
소수가 마실을 하고 난 다음에 따돌림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한 달간 '마실 금지'를 시도했어.
우리가 공부했던 학교 폭력 관련 책을 쓴 선생님을 모셔 부모 교육도 진행했어.
노르웨이의 '올베우스 프로그램'을 시도해 보기로 했지.
선생님들은 너희들의 눈높이에 맞춰 '평화교육'을 진행하셨어. 너희들이 '혼자 있는 친구가 없는지 둘러 보기' 같은 터전의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지. 엄마는 더 많은 다른 부모들과 긴 시간 동안 '공동 학습', '공동 탐구'를 해 나갔고 해보내기 잔치 때 이 내용을 연극으로 담아 공연도 했지.
엄마가 학교 폭력을 멈추는 데 핵심 키가 되는 '멈춰!'를 외치는 방관자 1 아이를 맡았는데, 엄마의 연기가 너무 뛰어났던 건지, 발연기였던 건지, ㅎㅎㅎ 너희들은 너무 즐거워 했고 '멈춰!'는 너희들 사이에 유행어가 되었어. 너희들의 어려움도 차차 해결되어 갔지.
교육이사로서 이런 과정들을 주도했음에도 정작 엄마의 미워하는 마음을 깔끔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어.
그런데 너는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이제 알아서 셀프로 똥침을 날리더라고.
“엄마, OO이가 나한테 OOO 해 놓고 사과도 안 하고 가 버렸어. 오늘은 OO이한테 똥침 한 번 할려구. ㅋㅋㅋ”
그리고선 다음 날로 그 친구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을 하더라고. 나눠 먹을 간식을 챙기면서 OO이 것도 야무지게 같이 챙기더라고. 너는 엄마보다 훨씬 빨리 불쾌한 감정, 미운 감정을 털어버리더라고.
너는 다시 그 친구를 마실 초대하기 시작했어.
그때부터 몇 개월이 지난 뒤에야 엄마의 감정은 천천히 달라지기 시작했어. 네가 잠시 미웠던 친구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을 초대하고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도 엄마의 감정을 천천히 떠나보낼 수 있었어.
너는 결국 그 친구와 결국 단짝 친구가 되었어. 고학년이 되어 너희는 매주 한 번씩 둘이 떡볶이도 먹으러 다녔어. 단짝으로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느 새 엄마의 마음도 흐뭇하게 바뀌어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지.
그 친구가 아빠의 직장으로 인해 멀리 떠나게 되었을 때 네가 너무 슬퍼하고 서운해했잖아. 그 때쯤엔 엄마도 어느 새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변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엄마도 그 이별이 마음 아팠거든. 오랫 동안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줘서 정말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거든.
아이야.
너에게서 똥침 한 번으로 미움을 날려 버리는 방법을 배웠어.
그럼에도 너처럼 한 번에 미움을 날려 버리는 게 쉽지는 않았어.
엄마가 참 못났지?
네가 엄마보다 훨씬 나았어.
아이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맞는 말이라는 걸 널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어.
엄마는 너를 보면서 참 많이 배웠어.
미운 감정을 어떻게 날려 버리는지를 배웠어.
한 마디의 말을 바꾸고 한 번의 태도를 바꾸면 관계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
어려운 시기를 거치고 나면 진짜 단단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
엄마는 있잖아.
여전히 종이에 아무도 모르게 해삼멍게말미잘… 적어야 할 지도 모르겠어.
여전히 엄마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얼굴 빨개질 때까지
물구나무를 서서 버티기를 해야 할 지도 몰라.
그래도 계속 너처럼 연습해 볼게.
그냥 오늘 한 번 똥침으로 날려 버리는 연습을 할 거야.
그냥 오늘 한 마디의 말을 바꿔 볼 거야.
그냥 오늘 한 번의 태도에 정성을 다해 볼 거야.
아이야. 오늘도 엄마는 너에게 배운 대로 그렇게 연습하며 살아 볼께.
오늘도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