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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초고추장이 좋다고 했어

너에게 배운 것

by 아라

네가 4살 때 일이었어.

4살이라지만, 30개월 쯤이었지.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다닌 지 한 2주쯤 되었을 무렵.

날적이(주1)에 이렇게 써 있더라고.


찐 브로콜리, 초고추장, 김치(배추, 깍두기), 오징어 볶음을 놓는데
"이게 뭐지?" 하늘이의 낭랑한 목소리.
"응. 브로콜리야."
"나 이거 좋아하는데."
하늘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초고추장.


그 아래 선생님은 그림까지 그려 놓으셨지.


엄마는 너와 선생님의 대화에 빵 터지고,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려 놓으신 선생님의 다정함에 웃음이 났지. ㅎㅎㅎ

'오잉? 초고추장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ㅋㅋㅋ'


날적이의 뒷 부분에는 네가 브로콜리를 먹은 이야기도 쓰여 있었어. 너는 브로콜리를 손으로 잡고 꾹 찍어 먹었대. 그리고 나서 물을 찾고, 물 먹고 또 먹고, 물 먹고 또 먹고...


선생님들의 대화도 적혀 있어. ㅋㅋㅋ 너는 선생님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지.

"매운 것 잘 못 먹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먹어본 적이 있나 봐요."


그 즈음 너는 집에서 밥 먹을 때는 김치를 씻어 달라고 했지만, 종종 이런 자랑도 했어.

"어인집(=어린이집)에서는 김치 그냥 먹을 수 있어!"


결국 너는 그해 겨울,

너희 손으로 직접 배추벌레 잡아가며 기른 배추로,

너희 손으로 조물조물 무쳐 김치를 만들어 먹어본 후부터,

매운 김치도 너무나 맛있게 먹게 되었지.


아이야.

너는 새로운 음식이 식탁에 올라 오면 일단은 꼭 먹어본단다.

그렇게 먹어 보고 대부분은 이렇게 말해.

"음, 괜찮은데?"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너도 고기를 좋아하지만,

온갖 야채들을 잘 먹지.


심지어는 싫어해서 잘 먹지 않던 오이도,

늘 엄마, 아빠가 먹는 걸 보면서 신기하다더니,

어느 날 재도전을 하더라고.

생오이 대신 오이 무침을 먹어 보고,

커다란 생오이 대신 잘게 썬 오이가 들어간

지중해식 토마토 오이 샐러드를 먹어 보고, 점점 익숙해지고,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생오이도 쌈장, 고추장 찍어 가며 잘 먹더라고.


넌 어릴 땐 조개를 좋아하지 않았어.

10살쯤 되었을 때 동해안의 바다에서

너희들이 직접 잠수해 모래를 파서 잡은 조개를,

계속 함께 간 친구들과 물을 갈아 주면서 하루 동안 해감해

물을 부어 끓인 조개탕을 맛본 뒤로는,

조개의 맛을 알게 되고 조개도 잘 먹게 되었지.


동남아에 가면 향이 강한 음식들이 많잖아.

너의 중학교 졸업 기념으로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

우린 현지에서 똠양꿍을 먹어 보기로 했어.

한국에서도 비누맛이었는데 동남아에서도 비누맛일까 궁금해서 말이지. ㅎㅎㅎ


우리는 그 날,

"한국 비누와는 다른 OO 비누 맛인 것 같아."

"내 취향 비누는 아니네."

"왜 한국 비누보다 맛있는데? 잘 찾아왔어."

"아, 아깝다. 살구 비누를 넣었으면 더 맛있었을 텐데. ㅋㅋ"

"근데 계속 먹다 보니까 점점 맛있게 느껴져. 알고 보니 나 비누 좋아하나 봐."

등등 재미로 가득 찬 대화를 나누면서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똠양꿍을 맛있게(?) 다 먹었어. ㅎㅎㅎ


아이야.

너는 새로운 음식을 보면 일단 먹어 보지.

심지어 너는 먹어보기도 전에 초고추장을 좋아한다고 했어. ㅎㅎ

너는 놀이 공원에 가면 왠만한 놀이기구를 한 번씩 타 보지.

너는 학교에서 새로운 강의나 새로운 체험, 새로운 경험의 기회가 주어지면

늘 그러더라고.

'한 번 해 볼라고.'

'그냥 재밌어 보여서.'


아이야. 있잖아.

엄마는 너의 그 가벼운 선택이 좋아.

너의 그 '한 번'이 좋다.

너의 '그냥'이 참 좋다.


신중하게 해야 할 일들에는 신중함도 필요하겠지.

중요한 선택을 하기 전에 여러 가지 고려할 것도 많겠지.


그런데 선택들이란 모두 내가 가진 한계 속에서의 선택이거든.

그런데 미래는 모르는 거거든. 사람의 영역이 아니거든.


어쩌면 신중함이란 게 자기 계산의 한계에 빠지는 과정일지도 몰라.

어쩌면 선택이라는 게 자기 한계 안에서의 선택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하는 가벼운 선택이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한 번' 해 보는 것이 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지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그냥' 해 보는 것이 네가 가려는 길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몰라.


아이야.

엄마도 너처럼 하려고 해.


계산하지 않으려고,

신중하지 않으려고,

엄마의 인식과 한계에 갇힌 신중함은 이제 그만 버리려고.


후회될 것 같으면 '그냥' 해 보려고,

재밌을 것 같으면 '한 번' 해 보려고,

마음이 이끄는 길이면 '그냥' 가 보려고.


성공이든 실패이든 그 어떤 경험이든

엄마의 긴 인생에서 그 경험이 어떻게 다시 쓰이게 될지, 어디서 다시 필요로 할지 모르는데,

엄마의 인식으로 한계 짓지 않으려고.


늘 엄마를 돌아보게 하고

늘 엄마를 또 한 발 앞으로 이끌어주는 아이야.


고맙다. 엄마도 너처럼 해 볼게!

엄마도 아직 먹어보지도 않은 초고추장을 좋아해 볼게!


앞으로 20년 뒤 당신은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배를 묶은 밧줄을 풀어라. 안전한 부두를 떠나 항해하라.

무역풍을 타라. 탐험하고, 꿈꾸고, 발견하라.

-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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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 작가 연재글 오전 7시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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