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지 않는 교육 1
어느 날, 워크숍을 위해
강의장에 둥글게 의자를 세팅해 놓고 느낌카드를 펼쳐 놓고 참여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여자들은 모두 아이가 있는 양육자들. 엄마, 아빠, 이모...
이 날은 몸으로 배우고 느끼는 워크숍 날이라, 책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책상은 모두 치우고 의자만 둥글게 세팅.
일부는 이미 도착해 자리를 잡았고,
우리는 인사를 나누며 모두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분이 들어오자마자 무언가에 놀라시더니 바로 뒤돌아 나가셨다.
얼른 따라 나가 물었다.
"금방 들어오신 거 봤는데 바로 돌아나가시길래 따라 나왔어요. 급한 일이라도?"
"딱 걸렸네요. (웃음) 사실 의자 세팅해 놓은 거 보고 무서워서 도망 나왔는데 ㅎㅎㅎ"
"네?"
여러 엄마들 사이의 유일한 아빠였다.
둥글게 세팅해 놓은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고.
얼른 오늘 활동을 소개해 드리고
원치 않는 말을 해야 하는 일은 없다고 알려 드렸다.
다행히 발길을 돌려 들어와 함께 해 주셨다.
그날, 둥글게 앉는 것이 ‘낯선 배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최소한 12년을 교육받아 온 우리들이라 그런가 보다.
그러고 보면 학교는 둥글게 앉는 곳은 아니다.
가끔 있는 모둠 활동을 제외하면 대체로 앞을 보고 앉는다.
앞을 보고 앉으면
앞에 선 사람은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을 볼 수 있다.
앉아 있는 다수는
앞에 선 사람을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앞, 뒤, 옆 다른 이들을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 뒤통수만 보인다.
앞을 보고 앉는다는 것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
앉아 있는 이들은 듣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앞을 보고 앉는다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의미한다.
둥글게 앉는 것은 다르다.
둥글게 앉으면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둥글게 앉으면 누구나 다른 모든 이들을 볼 수 있다.
둥글게 앉으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말하고 모두가 들을 수 있다.
둥글게 앉으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둥글게 앉는다는 것은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공간"이자 "지향"이다.
활동에 사용하는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운다’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함을 가진 존재들,
서로 다르기에 우리의 배움은 가능해집니다.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삶,
누구도 누구 위에 군림하지 않는 배움의 시공간은
우리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래 전,
워크숍의 참여자로 함께 했던 첫 자리가 생각났다.
워크숍이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었는데,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진행자들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결론은 각자 가져가도 괜찮다 하였다.
이 자리를 통해 자신에게 다가온 질문 한 가지만 간직하고 돌아가도 충분하다 하였다.
그리고 몰랐던 놀라운 얘기도 들었다.
해외에서 진행되는 국제 평화교육 자리에서,
이렇게 몸 활동 중심의 워크숍을 마치고 나면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만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정답은 무엇인가요?"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다, 결론은 각자 느끼고 생각한 대로 가지시라, 해도,
한국인들은 끝까지 묻는단다.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교수님 생각은 어떠세요?”
첫 날, 사실은 나도 질문하고 싶었다.
뭔가 허전했다.
누군가 명쾌하게
방금 했던 활동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를 바랐다.
나는 왜 어떤 권위 있는 이의 입을 빌어
정답과 결론을 확인하고 싶었을까?
늘 정답을 원하는 교육에 길들여져 있었서?
정해진 정답을 맞추는 데에만 관심을 두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한국식 주입식 교육에 길든
'답정너' 출신이라 그럴 것이다.
정답은 질문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 찾는 것이었다.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것이었다.
'가르치지 않는 방식'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까지 받아 왔던 교육이 거꾸로 뒤집히는 경험이었다.
신기하게도 평화교육은 공동육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둥글게 앉아 워크숍을 시작하듯
공동육아 아이들은 매주 둥글게 앉아 모둠을 한다.
자그마치 4살 때부터 둥글게 앉아
듣고 말하기를 연습한다.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출발점이 같았다.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배우는 교육이라는 점이 같았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배운다는 점이 같았다.
아이가 공동육아에서 배우듯,
어른인 나도 지금까지
공동육아에서, 평화교육에서 둥글게 앉아
때로는 참여자로 때로는 진행자로 함께 하고 있다.
어릴 때 못 배운 ㅎㅎ
나에게 꼭 필요한 삶의 양식들을 배웠고
지금도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