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지 않는 교육 2
둥글게 둘러앉은 가운데 진행하는 ‘손님 모셔 오기’라는 활동이 있다.
이 활동의 핵심은 ‘빈자리’에 있다. 의자의 개수는 사람 수보다 한 개가 더 많다. 하나 남아 있는 빈자리에, 빈자리 양옆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한 사람의 손님’을 모셔 와 ‘빈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음악이 흘러나온다. 빈 자리 양옆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한 사람의 손님을 모셔 와야 한다. 빠르게 서로의 눈빛을 읽고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그를 모시고 빈 자리로 돌아오면
‘한 사람의 손님’이 일어난 곳에 또 빈자리가 생긴다. 새로운 빈자리 양옆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 또 다른 ‘한 사람의 손님’을 모셔 온다. 그러는 동안 점점 음악이 빨라지고, 음악에 따라 우리 몸도 빨라진다. 이렇게 계속 음악이 끝날 때까지 진행된다.
어찌 보면 무척 단순한 활동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다.
제가 목격한 첫 번째 신기한 일은 내 옆에 빈자리가 생긴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제주도 어떤 학교의 선생님들과 이 활동을 진행해 본 적이 있다. 이 자리에는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을 비롯하여 약 서른 명의 선생님이 함께 하고 있었다. 가장 여러 번 내 옆의 빈자리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교장 선생님이다. 학교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분, 학교에서 (대체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분이 내 옆의 빈자리가 생긴 것을 가장 늦게 알아차리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른다.
내 옆에 빈자리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실은 나도 한 템포 늦게 내 옆 빈 자리를 알아차렸다.
두 번째 흔히 목격하게 되는 일 중 하나는 같은 사람을 자꾸 데려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묘한 역동이 일어난다. 음악이 끝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초대 받지 못한 사람들은 내심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를 초대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드는 것이다. 내가 진행을 할 때는 아직 초대받지 못한 참여자들이 있는지 눈여겨 본다. 그리고 한 곡이 끝남과 동시에 한 번의 활동을 마치고 나면 질문한다.
"아직 초대받지 못한 분이 계신지 아십니까?" 또는 "아직 초대받지 못한 분 계십니까?"
누군가가 손을 들면 한 번 더 활동을 진행한다. 이번에는 깨어 있기를 요청드린다.
"이번에는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 아무도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 없도록 모두를 초대해 볼까요?"
미션을 부여받은 참여자들은 모두 정신을 바짝 차리고 활동에 임한다. 그렇게 하면 활동하는 내내 모든 사람들이 '깨어 있다.' 모두가 모두를 초대하고 있는지 주위를 살핀다. 알아차림의 감각이 민감해진다. 음악이 나오는 2-3분 동안 모두를 초대하기 위한 미션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결국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자리를 만들어낸다. 3분 사이에 공기가 바뀐다. 내가 잊혀지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에서, 함께 한다는 소속감과 아무도 나를 소외시키지 않으리라는 안전감으로 변화한다.
10년 전 처음 일터에서 전임자 분께 첫 인수인계를 받을 때가 기억난다. 이 일을 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단어는 ‘환대’라는 것. 처음에는 그저 친절하게 대해 주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곧 평화교육 워크숍에서 '손님 모셔오기' 활동에 참여한 후 '환대'의 뜻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환대를 다룬 김현경의 책(주1)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로 시작된다. 주인공 슐레밀은 어떤 사나이에게 그림자를 팔아넘긴다. 그림자 따위, 특별히 어디 쓸 곳도 없으니까. 그는 그림자를 판 댓가로 금화가 나오는 마법 주머니를 얻는다. 부와 호사를 누리고 부러움을 받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곧 경멸의 대상이 되고 추방당하게 된다. 그는 결국 부리던 하인마저 부러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가장 비천한 하인도 그림자를 갖고 있었고 태양 아래에서 자신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주2)이다.
이 예시는 사회의 어떤 구성원이 일정한 결함(이라고 생각되는 특성)을 가진 또는 나와 다른 특성을 가진 타인을 만났을 때 낙인을 찍고 구성원으로서의 성원권을 뺏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상징이다. 책을 읽으며 사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작가 김현경은 인간과 사람을 구별하여 정의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인간으로 정의한다. '사람'은 사회에 자리가 마련되면 공동체의 인정을 통해 성립하는 자격으로 정의한다.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이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공동체에서 성원권을 가질 때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된다고 말한다. 김춘수의 ‘꽃’에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타인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말해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주3)
‘손님 모셔오기’ 활동은 정확히 ‘환대’의 의미를 찾는 활동이다.
누군가의 존재를 인정하려면 그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의 자리를 마련하려면 내 옆에 아주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환대’이다. 또 내가 성원권을 가진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환대’하여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내 옆의 공간을 기꺼이 내어 주었는지 돌아본다. 누군가가 자기 옆에 나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기억을 소환한다.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절대적 환대’를 제안한다. 절대적 환대는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상대가 적대할지라도 기꺼이 행하는 환대라는 것이다.
‘손님 모셔오기’를 통해 ‘환대’가 다시 보였고 재정의되었다.
내 옆에 기꺼이 빈 자리를 내 주는 일, 곁을 내주는 일이 ‘환대’이다. ‘환대’는 내 옆에 자리가 비었다는 사실, 어제까지 여기 있는 누군가가 사라지면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내 옆자리를 내어주고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환대다. 활동을 통해 마음 속으로, 추상적인 관념으로 하는 ‘환대의 마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로서의 ‘환대’가 다가왔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주4)
※ 주1, 3, 4 :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2015, 문학과지성사.
※ 주2: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2024,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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