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누군가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by 아라온

불쑥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그 무렵 우울이라는 것이 찾아와 내면에 깊게 파고들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반복되는 것들, 익숙한 것들로부터 잠시라도 떨어져 있었으면 했다. 남편도 친구도 없이 혼자 속초행 시외버스를 탄 이유다. 꼭 속초 여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디든 상관없었지만 푸른 바다는 보고 싶었다. 터미널과 바다가 가까운 곳을 떠올리다 속초가 생각난 것이다.


버스가 약속한 시간에 에누리 없이 터미널을 빠져나간다. 익숙한 곳에서 점점 멀어진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버스는 달린다. 주말이라 길은 평소보다 막혔지만 전혀 짜증이 나지 않는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 낯선 곳으로 가고 있음이 그저 즐겁다.


마침내 속초다. 버스에 혼자 올랐던 남자는 터미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진한 포옹을 나눈다. 버스에 탈 때처럼 내려서도 혼자인 나는 서둘러 터미널을 빠져나온다. 외로움을 느끼기에는 햇살이 너무도 따뜻하다. 외투를 벗어 허리에 두르고 자연스레 바다로 향한다. 모두 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인지 걷는 이들이 많이 없다. 햇빛을 만끽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낮은 담벼락의 오래된 집들과 낮은 가로수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집에서 새 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지팡이를 짚고 걷는 동네 할머니는 정겹다. 따뜻한 분위기에 취할 즈음, 바다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바다다! 푸른 바다!

바다와 하늘의 푸름에 우울함이 씻기는 듯하다. 오랜만에 마음이 평온하다. 번잡한 카페를 피해 조용한 카페를 찾아 들어간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앉아 넋을 놓고 바다를 바라본다. 주말에 혼자 여행을 온 손님이 마음이 쓰였는지 아니면 우울해 보였는지 카페 주인은 커피와 함께 주문하지도 않은 달달한 쿠키를 함께 내어온다. 그 마음이 고마워 살짝 웃어 보인다.


오래된 부부

복잡한 머릿속이 바다와 하늘을 닮아 고요해질 때 즈음 중년의 부부가 카페로 들어온다. 카페 밖 파티오에 자리를 잡는다.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다. 아내가 먼저 테이블 왼쪽 끝에 앉는다. 남편은 빈 의자 세 개를 건너뛴 자리에 멀찌감치 자리를 잡는다. 부부는 각자 바다를 보다가 음료를 마시다가를 반복한다. 바다 보기를 먼저 마친 남편이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본다. 그보다 좀 더 오랫동안 바다를 보던 아내는 고개를 돌려 남편을 보고 말한다.

"좀 이쪽으로 와서 앉아 봐."

그제야 부부는 가까이 어깨를 맞대고 앉는다. 여전히 남편은 휴대폰을 보고 아내는 바다를 보고 있지만 이따금 짧은 대화가 오간다. 어쩐지 남편과 나의 여행을 보는 듯하다.


중년의 부부를 먼저 보내고도 한참을 더 그 카페에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까닭이다. 그저 바다나 봐야겠다고 떠나온 여행이라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지도 어디에 가 보고 싶다는 욕구도 없다. 일단은 카페를 나와 바다를 따라 걸어 보기로 한다. 해수욕장이 파한 바다는 한산하지만 여전히 뜨거운 한낮의 열기를 식히려는 이들 덕분에 적막하지는 않다. 탁 트인 바다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드넓은 백사장에 퍼져 적당히 흥겹다.


아빠와 딸

아이는 5살쯤 되어 보인다. 여행객들로 붐비는 속초의 어시장 근처를 아빠와 함께 구경 중이다. 아빠는 딸아이를 인파에 놓칠세라 그 손을 꼭 쥐고 걷는다. 별안간 아이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나 키 작아서 아빠 손 잡는 거지?"

"응, 그렇지."

"그럼 키 크면 나 아빠 손 안 잡아도 되는 거지?"

아빠는 분명 멈칫했다.

"아니야, 커도 아빠 손 잡아야 돼"

"왜?"

"OO이 커서 아빠 손 안 잡으면 아빠가 슬퍼. 아빠 슬픈 거 싫지?"

"응, 커도 아빠 손 잡을게."

아이는 언제까지 아빠의 손을 잡아 줄까. 나는 아빠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은 게 언제였던가. 그 아이와 아빠의 약속이 부디 오랫동안 지켜지면 좋겠다.


청년

속초 시내를 이리저리 걷다 보니 어둑해졌다. 지지 않을 것처럼 작열하던 뜨거운 해가 사라졌다. 해를 대신할 따뜻한 불빛을 찾아 들어간다. 작은 서점이다. 책과 따뜻한 커피로 짧은 여행의 아쉬움을 달랜다. 이제 막 속초에 도착한 듯한 앳된 청년들이 서점으로 들어온다. 어깨에는 미러리스 카메라를 둘러메고 서점 곳곳을 구경한다. 간간이 카메라에 무언가를 담아낸다. 책과 사진을 좋아하는 청년의 감성이 어여쁘다. 그 시절의 내가 떠올라 애틋하기까지 하다.


시외버스를 탄 목적을 이루었다. 푸른 바다를 보았고 우울함을 떨쳤다. 지루한 일상을 다시 이어갈 힘도 얻었다. '완벽한 날이었다. 서점 이름처럼. 가끔은 그래서 떠나야 한다. 어디로든.

keyword
작가의 이전글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