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서
한낮의 버스는 오후 햇살만큼이나 여유롭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과 히터가 만들어 낸 더운 공기가 버스 안을 데운다. 차가운 바깥공기를 예상하지 못할 정도다. 승객들은 나른한 따스함에 취한다. 졸린 눈을 끔뻑거리고 머리를 끄덕인다. 간간이 눈을 뜨고 자세를 고쳐 바로 앉는 때는 버스가 정류장에 멈출 때다. 버스 문이 열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그때 내가 눈을 뜬 이유다.
"D동 가지요?"
할머니는 버스에는 오르지 않고 기사에게 물었지만 기사는 답이 없다. 답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서 있는 곳이 바로 D동이었으니. 계속 들어오는 찬바람에 승객들이 모두 할머니를 쳐다본다. 기사가 어서 상황을 정리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둘 사이를 오가며 바라본다. 기사와 할머니 간에 몇 초의 침묵이 흐르고 할머니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300번 버스로 갈아타려고요."
기사는 그제야 입을 뗀다.
"조금 걸어야 돼요. 타세요."
드디어 버스 문이 닫히고 할머니가 올라탄다. 승객들에게 미안했는지 아니면 기사와의 대화가 불편했는지 할머니는 버스에 오르며 한 마디를 한다.
"아휴, 이 동네 처음이라...잘 몰라서..."
짧은 소동이 지나가고 다시 버스는 나른해진다.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눈을 감는다. 부산함에 눈을 뜬 건 세 정거장쯤 지나서다.
"아주머니, 300번 버스 타시려면 여기서 내리세요."
중년의 아저씨는 자신이 내리기 전 할머니에게 말한다. 할머니가 탈 때 했던 말을 잊지 않고 내릴 곳을 알려준다. 갑작스러운 아저씨의 말에 당황한 할머니는 어쩔 줄 모른다. 아저씨도 이를 눈치챘는지 다시 한번 묻는다.
"G로 가세요?"
"네!"
할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대답한다.
"저도 거기로 갑니다. 저도 그 버스 탈 거니까 같이 가세요. 여기서 내려서 조금 걸어야 돼요."
"아이고, 네. 그래요. 고마워요."
버스 뒷문이 열리고 아저씨와 할머니가 차례로 내린다. 찬 바람이 어김없이 그 틈을 비집고 슝 들어오지만 어쩐지 덜 춥다. 아저씨 뒤로 할머니가 300번 버스를 타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가롭던 버스에 우르르 사람들이 올라탄다. 좌석은 금세 다 차 버린다.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르는 아저씨는 두 손에 가득 짐을 들었다. 자리를 둘러보다가 마땅치 않은지 포기하고는 뒷문 쪽으로 가 넓은 공간을 찾아 선다. 짐을 내려놓고 한 숨을 돌린다. 그때 아저씨 등 뒤에 앉아있던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심한 듯 아저씨를 힐끗 바라보더니 바퀴 때문에 우뚝 솟은 불편한 앞자리로 옮겨 간다. 아무 말도 없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던 아저씨는 가까운 곳의 빈자리를 발견하고는 다행이라는 듯 그리로 가 앉는다.
한낮의 버스에는 오후 햇살만큼, 겨울의 히터만큼 따뜻한 마음이 흐른다. 인간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새삼 깨닫는다. 타인이 타인에게 베푸는 선의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나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