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할 날을 기약하며
오랜만에 에이전시에서 연락을 받았다. 내 샘플을 받아보고 싶다며 의뢰를 한 출판사가 있다고 했다. '지정 샘플'은 처음이라 설렜다. 어떻게 지정하게 된 걸까? 내가 번역한 역서를 보고? 내 프로필을 보고? 어떤 경로로 지정하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뿌듯했다.
많은 엄마들처럼 나도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아기가 삶의 1순위가 되었고 아기를 돌보는 삶에 방해가 되는 일들은 순위가 밀려났다. 몸을 혹사시키면 육아와 이번에 의뢰받은 역서 번역을 동시에 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 건은 분량이 꽤 되는 데다가 잘 모르는 분야였고 일정도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왠지 일도 육아도 성에 찰만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번역 샘플을 수락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분량이 조금만 더 짧았다면, 내가 좋아하거나 잘 아는 분야였다면, 일정이 조금 더 넉넉했다면... 하지만 내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책은 잘 올라오지 않았다. 이렇게 매번 거절하다가 다시 일할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이 됐지만 결론은 NO. 예전에 한창 번역 일에 푹 빠져있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결론이다.
요즘 운전연수를 받고 있는데 (운전 연수도 아기를 태우고 다니기 위해 받고 있다) 문득 운전 선생님이 예전에 회사 다니던 삶이 더 행복해요? 아니면 지금 아기 돌보는 삶이 더 행복해요?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운전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과거의 나라면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연히 아기를 돌보며 틈틈이 번역 일 하는 삶이라고 했을 텐데, 지금 틈틈이 번역을 하지 못하고 아기가 전부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보니 그런 걸까?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린 내 모습이 낯설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한 건 마음 한편에 육아에 올인하다가 다시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서려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육아휴직 일정에 한계가 있는 엄마라면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육아와 일을 병행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 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 프리랜서 일의 특성상 실력이 줄지만 않았다면 언제든 복귀할 수 있다. 나중에 아기가 지금만큼 나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게 됐을 때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틈틈이 글을 쓰고 영어 영상을 자막 없이 보는 연습을 하곤 있지만 아무래도 강제로 고정된 루틴이 없으니 부족함을 느낀다.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잘하고 싶다면,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어느 정도 강제성이 필요하다. 아기를 낳고 보니,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몸이 힘들고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강제성이 없을 때 미룰 수밖에 없게 되더라. 그래서 필라테스 수업도 주 3회 시간을 고정해 놓고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시간을 변경하지 않고 꼭 지킨다. 브런치를 매주 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글쓰기 실력을 잃지 않고 싶어서다. 운동과 글쓰기처럼 번역도 실력을 잃지 않을 수 있게 꾸준히 고정시켜 놓고 연습하는 시간을 마련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