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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Aug 08. 2020

읽그 27.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나는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배를 타고 있다. 그것만큼은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이다.”(<당신을 살릴까, 나를 살릴까> )


술에 취한 듯한 낯선 목소리가 스마트폰 너머에서 흘러나온다. 모르는 여자다. 여자는 그럴듯한 자기소개는 사치라는 듯, 전화를 건 간단한 용건마저 생략하고 다짜고짜 묻는다. 착화탄으로 죽는 것은 많이 고통스럽냐고.


전날 자정까지 일하고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난 다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길에 받은 전화다. 평소에도 각종 문의는 물론 장난전화도 심심치 않게 받지만, 이건 좀 심하다. 이것 또한 고약한 장난전화 중의 하나인가, 그가 생각하고 있을 때 여자가 다시 입을 연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 그는 119와 경찰에 차례로 신고한다.  


‘특수 청소업’에 종사하는 저자의 이야기다. 일면식도 없는 여자는 그를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걸까. 그는 여자가 자신의 블로그를 보고 하단의 전화번호로 연락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 혼자 사는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입자가 남겨 놓은 집안의 거대한 쓰레기산을 제거해야 할 때, 유혈이 낭자한 범죄현장을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려 놓아야 할 때, 사람들은 그를 현장으로 부른다.  


한 사람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가 장의사라면, 저자는 한 사람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을 수습하는 사람이다. 그는 보통 남겨진 사람들이 처리하기 곤란한 현장으로 호출된다. 외롭고 쓸쓸하게 떠난 사람은 보통 냄새라는 마지막 신호로 세상에 자신의 죽음을 알리게 마련이다. 죽음의 냄새는 곧 부패의 냄새다. 고양이를 데리고 사는 저자는 작업 현장에서 한때 고양이었던 생명의 흔적과 마주하기도 한다. 오줌이 담긴 수천 개의 페트병을 목격하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떠난 이가 산 자였을 때 이상적인 마지막으로 생각했을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날 저자에게 전화를 걸었던 여자는 어딘가에서 그가 언론과 가진 인터뷰를 읽었거나, 검색을 통해 블로그를 우연히 찾았을 것이다. 결심이 서지 않아서 죽음 전문가라 할만한 그와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을 것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의 문턱까지 왔더라도 최종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을 테니까.


자살은 나쁜 것일까. 자신에게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자살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을까. 한 사람이 삶에서 탈출하려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는 것일까. 저자는 짧은 순간 자문하지만 결국 여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119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다. 전화를 받은 경찰은 그가 있는 곳으로 다른 경찰을 보내겠노라고 한다.


“그 말을 듣자 가슴에 현 하나가 날카롭게 끊어진다. 명치께 머물며 뜨겁게 끓어오르던 것이 좁은 눈시울로 몰려와 왈칵 쏟아질 듯하다.”


저자는 자신이 아니라 여자가 있는 곳으로 경찰을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쪽에서도 경찰이 수행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다시 여자와 통화를 시도해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동안 기지국을 통해 여자의 위치를 추적하고 가능한 한 빨리 여자를 찾을 계획이다. 여자는 전화를 받지만 통화는 곧 끊어진다. 저자는 경찰과 함께 서로 이동해 진술을 마치고 초조하게 여자를 찾았다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의 휴대폰으로 ‘나쁜 시키’라는 문자가 날아든다. 여자의 번호다. 죽은 사람은 문자를 보낼 수 없다. 여자는 살아있다. 여자를 찾았고, 남편을 불렀다는 경찰의 말이 잇따른다. 그래, 경찰과 119를 불러 계획을 망쳐놓았고, 죽음에 대한 자유를 침해했으니 자신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여자의 전화번호를 저장한다. 또 언젠가 여자가 자신에게 연락을 하면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리고 마음으로 용서를 빈다. 혹여나 여자가 또 전화를 걸게 된다면 그때도 여자를 막을 힘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때 자신은 살아야 했고 여자가 살아야 자신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책의 1부에서는 의뢰를 받고 현장을 찾는 이야기를, 2부에서는 주로 관련 에피소드와 함께 업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풀어낸다. 뜻밖의 전화통화로 시작된 길고 길었던 하루, 한 사람을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붙들었던 이 에피소드가 2부에서 가장 머릿속에 깊게 남았다. 나 또한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 같지만, 그의 행동에 대한 가치 평가는 유보하고 싶다. 다만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그가 느꼈던 가슴의 고통, 순간의 절망과 희망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함께 배를 타고 있다”는 그의 말을 곱씹게 된다.


인생은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언젠가부터 자신이 타인에게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당하는 것도 꺼리는 태도가 상식처럼 자리 잡았다. 이런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연결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이 얼마나 관계의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피해를 주고받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산뜻한 삶. 물론 좋다.


사실 나는 이런 깔끔함을 누구보다 좋아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남에게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혼자 힘으로 살아지는 것 같아 보여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내키는 대로 살다가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육신을 정리하는 것은 남에게 의탁해야 한다. 삶의 마지막을 수습하는 이 책의 저자는 현장에서 이 사실을 끊임없이 체감한다고 고백한다.


외로울 때는, ‘고독’이라는 단어 자체를 발음하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는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 상기시키기 어렵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괜찮다. 그리고 내가 괜찮지 않은 날, 누군가 나를 챙겨줄 것을 믿는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도 괜찮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마음이 상했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누르고 누르다가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현이 끊어지고, 삭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시끄럽지 않은 치어리더가 되고 싶은 나는 오늘도 고민한다. 내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크게 말하지 않고도 미끄러지듯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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