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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Aug 22. 2020

읽그 31. <스펙트럼>

김초엽 지음 / 허블

1. 학교에서 배운 외국어를 성인이 된 다음 실전에서 더듬거리며 사용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모국어의 품은 아주 따뜻하다는 걸. 외국어로 원어민과 소통을 시도할 때 나는 제2, 3의 자아를 갖는 느낌이 든다. 제2, 3의 자아는 조금 더 말이 없고, 얼핏 경청의 아이콘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다. 말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결국 말하지 않을 때는 들을 수밖에 없다. 특정 언어의 구사력과 수다력은 정비례한다. 한정된 어휘력 때문에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귀와 뇌가 언어적 메시지를 다 해석하지 못하고 그로기 상태에 빠지면 눈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대의 표정과 제스처를 열심히 살피고, 구멍 난 이해력을 메우기 위해  추론 능력이 동원된다. 익숙한 언어를 사용할 때와 외국어를 쓸 때는 모든 것이 다르다. 상대방에게 인식될 내 모습도 다를 것이고, 내가 느끼는 감각도 다르다.


2. AI 때문에 외국어 공부도, 통번역 공부도 언젠가는 필요 없어지는 게 아닐까. 칩만 심으면 각자 모국어를 쓰면서도 상대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가끔 공부가 귀찮아지거나 목적이 흐릿해질 때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상상은 평평한 세계에 발을 딛고 있을 때 가능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단편 <스펙트럼>을 읽으며 깨달았다. 끙끙거리며 외국어의 문법 체계를 배우고,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는 것도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기반을 공유할 때 가능한 일이다. 만약 가청 주파수대가 맞지 않아 상대의 발화를 아예 인식하지 못한다면, 상대가 문자 언어가 아니라 색채 언어를 쓰고 있다면.


이런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색채 언어라니, 배워봐야겠다. 그런데 수백 가지의 다양한 색상이 나한테는 동일한 빨간색으로 보이네.’ 희진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우주 탐사에 나선 생물학자 희진은 40년 동안 실종되었다가 발견된다. 자신이 우주 지성 생명체와 처음으로 접촉한 인간이라고 주장해 단숨에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위치 등 자세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곧 그의 주장은 무시되고 만다. 이제 희진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상대는 손주인 서술자 ‘나’다.


3. 희진은 표류한 행성에서 언어를 사용하고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지성 생명체를 만난다. 키가 크고, 팔이 3개인 개체가 많다는 것을 제외하면 지구인과 외모가 크게 다르지 않다. 행성의 풍경도 지구의 황무지와 비슷하다. 다른 무리인들은 희진을 구해준 개체를 ‘루이’라고 부른다. 희진은 루이의 동굴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루이는 다른 무리인들보다 조용하고, 종일 도구를 깎아 그 도구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과학자로 살아온 희진은 불시착 때문에 실험 도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의사소통이든 환경을 분석하고 기록하는 일이든 장비의 힘을 빌릴 수 없으니 자신의 감각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동안 희진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 관념적인 것, 감각의 바깥에 있는 것들을 다루어왔다. 원래 희진의 세계는 현미경 속에, 정량화된 데이터 속에, 그래프와 숫자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행성은 오직 희진을 둘러싼 풍경으로만 존재했고 희진은 그 사실을 수용해야 했다.”


4. 어느 날 희진은 루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무리인들의 수명이 몇 년에 지나지 않으며, 무리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게 된다. 그들은 죽음이 자아를 단절시킬 수 없다고 믿는다. 한 개체의 정신은 몸을 바꿔가며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스펙트럼>을 다시 읽으며 처음과 비교해 특히 흥미롭게 다가왔던 대목이었다. 첫 번째 루이의 장례를 치르며 무리인들은 루이의 시체를 배에 띄워 흘려보내고, 강 건너편에서 어린 개체를 배로 데려오는 의식을 치른다. <왕좌의 게임>에서 툴리 가문이 시신을 배에 띄우고 흘려보낸 다음 불화살을 배에 쏘는 장면이 떠올랐다. <반지의 제왕> 등에서도 익숙하게 본 장면이다. 지평선 너머로 혹은 자욱한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나룻배. 이승을 떠난 망자의 혼을 배웅하는 사람들. <스펙트럼>에서는 하나의 배가 사라진 대신 망자의 삶을 이어갈 또 다른 어린 생명이 기슭으로 다가온다.


2대 루이, 3대 루이를 거쳐 4대 루이와 지내게 된 희진은 드디어 루이가 그리던 그림의 정체를 깨닫는다. 4대 루이가 이전 루이들과 달리 그림에 접근하는 것을 너그럽게 허락했기 때문이다. 선명한 색채들 속에서 희진은 일정한 패턴을 찾는다. 루이들이 가장 햇빛이 잘 드는 동굴에서 매일 그림을 그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무리인들의 천적이 동굴을 습격하고, 이어지는 습격 속에서 몸을 피했던 희진은 다시 동굴을 찾지 못한다. 우연히 탈출 셔틀을 발견하고 구조될 때까지 몇십 년 동안 우주를 표류했다는 게 희진의 주장이다. 지구로 돌아온 희진은 여생을 유리 수집과 색채 언어의 해석에 바친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진은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기쁨을 느꼈다.”



5.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하려 하는 것. 김초엽 작가의 단편을 읽으며 늘 소통의 문제를 고민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양한 소재와 제재가 매력적이고, 모든 이야기가 참신하게 느껴지지만 주제의식은 아주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펙트럼>에서 희진이 바라보는 대상은 종의 구분을 뛰어넘은 타자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는 너무 빨리 죽어버리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완전한 타자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피부가 자신들보다 연약하다는 것을 학습을 통해 깨닫고 손의 힘을 줄인다. 친절함, 배려와 같은 태도를 그들 또한 가지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때, 그곳이 얼마나 ‘인간다움’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는 역시 내게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물론 인간다움에서 피와 광기의 역사를 제외할 수는 없다. 희진이 행성의 구체적인 정보에 대해 말을 아낀 것도 영화 <아바타>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다른 세계에서는 ‘남기고 싶은’ 인간의 특성들, 즉 배려, 이타심, 이해, 포용을 더 많이 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깨닫는다. 인간만의 독점적인 특성도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지구 상의 생명체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다.


(나를 포함해) 사람들은 고철 덩어리들의 움직임 속에서도 인간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사실 어떤 시공간에서, 어떤 외피를 두르고 출발하더라도 지금, 이곳 인간들의 이야기로 맺어버리는 독서를 해왔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작품을 읽으며 인간의 편견 아닌 편견을 발견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내가 어떤 가치를 ‘선’으로 생각하는지 깨닫는 것, 특정 가치를 공유한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 어떤 특징에서 동일성을 느끼는지 발견하는 것. <스펙트럼>을 읽으며 내 시선이 출발하는 지점을 감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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