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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Sep 12. 2020

읽그 36. <윤희에게>

임대형 지음 / (주)출판사 클



1.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이상 참을  없어질 때가."

영화 초반 윤희의 딸 새봄은 엄마에게 온 편지를 뜯는다. 새봄의 목소리로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마음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위 문장을 듣는 순간 쥰의 이야기, 혹은 윤희와 쥰의 이야기가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견뎌온 일상이 참을 수 없어지는 순간, 편지를 쓰고 싶어 지는 사람은 누구일까.


2. " 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과, 북적거리는 곳을 싫어하는 ,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을 좋아하는 것까지. 고모는 겨울의 오타루와 어울리는 사람이야. 겨울의 오타루엔 눈과 , 밤과 고요뿐이거든."

역시 쥰의 편지 구절이다. 쥰과 함께 살고 있는 고모 마사코에 대한 얘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쥰은 조용하고 수염 끝이 예민한 고양이 같았고, 마사코는 단정하면서 장난기가 있는 고양이 같았다. 마사코와 쥰이 사는 오타루는 눈이 끊이지 않고 내리는 동네다. 감독은 현지인의 눈으로 오타루를 보기 위해 도시 구석구석을 밟았다. 대본집 끄트머리에 있는 인터뷰에서 감독은 오타루의 인상에 대해 눈이 정말 많이 오고, 계속해서 눈을 치워야 한다는 막막함이 느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영화의 정서와 막막함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단다. (p.251)


3. 감독은 이어 오타루 주민들은 패딩을 입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옷차림으로 관광객을 구분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게 윤희에게 코트를 입힌 이유라고, 윤희는 오타루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코트를 입은 윤희가 춥고 서글퍼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의도가 있는 줄은 몰랐다. 하긴 윤희는 오타루에서 가기 전 일상에서도 어딘가 혼자 도드라지는 인상이었다.


4. "혹시 여태까지 숨기고 살아온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숨기고 살아요. 그러는  료코상을 위해서 좋아요. 제가 무슨 말하는지 알아요?"

수의사로 일하는 쥰이 고객인 료코와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하는 말이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조언을 해줄 정도면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다는 뜻일 텐데,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단호함도 함께 느껴졌다. 이 영화는 윤희의 출발과 여정, 변화를 중심축으로 삼는다. 쥰이 성인이 된 후 일본에서 겪은 일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쥰이 어떻게 살아왔을지 새삼 궁금해지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이 대사 이후 영화에서는 삭제된 료코와 쥰의 장면이 나온다.


5. "아빠는 나한테 무관심했거든. 엄마는 나한테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때문에, 자기 자신을 비난하곤 했었어."

엄마가 보고 싶은 적이 없었냐고 마사코가 쥰에게 묻는다. 쥰은 왜 자신이 부모의 이혼 후 아빠를 택했는지 아냐고 되묻는다. 그에 대한 쥰의 대답이다. 윤희의 딸인 새봄은 윤희와 사는 것을 선택했다. 새봄은 윤희에게 직접 그 이유를 전해준다. 윤희가 더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6. 영화의 미술 감독만 두 명이었다고 한다. '고양이의 집'으로 가정한 마사코와 쥰의 집은 고양이가 살고 있는 공간이고, 실제로 고양이 털을 여기저기 많이 묻혀뒀는데 화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는 감독의 말.


7. "추신. 나도  꿈을 ."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윤희가 쥰의 편지에 답장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라는 글을 읽었다. 쥰의 편지는 감성적이고, 윤희의 편지는 상대적으로 담백하다. 쥰의 편지는 그리움과 추억에서 비롯했고, 윤희의 편지는 오늘과 슬쩍 보이는 내일을 얘기하고 있다. 만남 이전과 만남 이후의 편지다. 쥰 역시 윤희가 편지를 쓰는 시점에서 또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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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먼저 봤고, 나중에 대본집을 읽었다. 두 경험은 분명 달랐다. 영화는 생략의 미가 돋보였고, 삭제 장면까지 품은 대본집에는 인물의 감정이 깊어지는 과정이 있었다. 저 아래 깔려있던 장면의 기억이 활자 위로 겹쳐졌다. 시간차를 두고 대본집을 읽으니 영화를 추억할 수 있어서 좋다. 대본집을 먼저 보고 영화를 봤다면 어땠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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