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에 들어온 말
“으-~응↗️”
“시작”의 또 다른 이름, “새해”의 글쓰기 수업에서 첫 과제는 <내 귀에 들어온 말>이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 글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미 잡아놓은 집콕 글쓰기 일정에 과제를 끼워 넣었다. 또 다른 시작도 있었는데, 그간 벼르던 테니스 수업을 처음 나가는 날이었다. 새로 만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유심히 듣고 기억에 남는 구절로 생각을 펼쳐보자 계획했다.
금요일 아침이다. ‘와! 테니스를 시작하다니! 신나!’ 설렜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열어 아침 산책 친구에게 “굿모닝! 8시에 만날까?”를 남기고 다른 창을 보았다. 인스타그램을 켜기 전, 카톡의 숫자 1은 코치님이다. “목이 너무 아파서 죄송하지만 오늘 수업이 어렵습니다. 자가검사 키트에 계속 음성이 나오는데, 불안하니 병원에 가야겠어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괜찮습니다. 쾌차하시고 뵈어요.”를 남겼다. 그리고 기척으로 먼저 눈이 떠있는 발 밑의 개를 보았다. 축 누워 흘낏 쳐다본다.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 개는 사지를 쭉 뻣으며, “으-~응↗️” 소리를 낸다. 일어나 처음 듣는 말이다. 1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개는 말이 꽤 늘었다.
“으-~응↗️”, “흐어엉~”, “앙아으!”, “으으으으-”, “컁! 컁!”
서로의 말을 알아들으려 모든 신호와 제스처, 당시의 상황을 온 감각을 동원해 습득해 뜻을 알고자 한다. 원래부터 이렇지 않았다. 개를 구조해 입양을 보내는 사설 쉼터에서 만난 이 녀석은 처음 내 집에 와서 무음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하고 수동적이었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쳐다보는 까만 눈만이 내게 적대감이 없다고 말했다.
동물병원의 선생님께, “혹시, 성대 수술을 시킨 적이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음... 그건 마취를 하고 성대를 들여다봐야 알 수 있어서 나중에 중성화 수술을 할 때 볼게요.” 하고 차트에 “성대 수술 흔적 체크”라고 적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관 대기실에서 기다린 개에게 “베라, 나 끝났어! 잘했어!, 가자!” 하자 개가 펄쩍펄쩍 뛰며, “컹!”하고 아주 큰 소리를 냈다.
“그래! 그렇게 짖는 거야!” 아주 큰 중음의 목소리였다. 나중에 치료를 하며 알았지만, 베라는 보호소와 쉼터 생활을 하며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다. 개가 같이 먹고 뛰고 자는 존재의 제스처를 보고 소리를 듣는 것을 안 것은 “으-~응↗️” 소리를 들으면서다. “으-~응↗️” 소리는 내가 아침에 일어나기 전, 사지를 쭉 뻗으며 내는 소리다. 기지개를 잘 켜는 개는 이전에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어느 날부터 기지개를 켤 때, 가만히 누워 지루한 듯 한 숨을 쉴 때, 먹을 것을 빨리 내놓으라고 할 때 등 다양한 으응~ 소리를 높낮이와 강세를 바꿔가며 내기 시작했다.
말이란 무엇인가. 상대와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교환하기 위한 음성 언어가 아닌가. 어떤 말은 소리 내어도 들리지 않고, 어떤 말은 한자라도 놓칠까, 가슴을 졸이며 듣는다. 아마도 내가 가장 잘 듣는 말은 비인간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청각이 예민한 나는 어릴 때부터 작은 소리의 말을 잘 듣는 편이기도 했지만, 많은 소음들에 민감했다. 삐이-하는 이명도, 기계음도 거슬릴 때는 온 집안의 코드를 뽑았다. 기계음이나 다른 소리를 컨트롤하지 못할 때는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아빠는 동생에게 “원래 못된 애들이 귀가 밝아.” 하며 나를 놀렸다. 듣기 싫은 소리는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데, 상황에 따라 같은 소리가 달리 들릴 때면 마치 나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또 어떤 기계음은 말과 비슷하다. “둥둥둥둥-” 울리는 냉장고의 소리는 이제 냉각을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럼, 속으로 ‘음, 냉장고가 돌아가는 군. 가만있어봐, 너무 자주 돌아가는데, 누가 온도를 지나치게 낮췄구먼, 조정해야겠어.’ 그렇게 다양한 소리 속에서 의미를 찾아 들을 수 있다. 또, 개나 고양이가 걸으며 바닥과 마찰해 내는 익숙한 발톱 소리는 내게 안정을 주는 백색 소음 중에 하나가 되었다. 16년 정도 기르던 고양이 두 마리를 모두 여의고, 집에 돌아올 때는 가전 소리, 윗집, 아랫집, 복도의 소리도 여전했지만, 집이 암흑과 같이 고요해 불안하고 외로웠다.
오늘 개의 “으-~응↗️”은 “암 레뒤”, 매일 나서는 산책을 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흥분하지 않도록 차분히 한 후 나가기에 좀처럼 가만있질 못하고 실룩거리는 궁둥이로 발동을 거는 개가 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신호를 기다린다. 상대가 달라지면 개는 다른 언어를 쓴다. 개에게 사랑을 자주 표현하는 동료와 함께 산책을 나갈 때는 자신의 신남을 높은 소리로 낸다. 그가 그것을 흐뭇하게 보기 때문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나를 아주 점잖게 반기는 반면, 활짝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신나게 뛰어가 아주 기쁘다는 것을 소리와 몸짓으로 보여준다.
유려한 말솜씨 자체에 빠지기도 하지만, 실지로 그가 하는 말보다 말하면서 보여주는 기운과 그를 둘러싼 환경, 당시의 상황을 함께 보고 듣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 자기 생각으로 빠진다. 같은 음성 언어를 공유한다는 조건이 오히려 주의력을 흩트린다.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 완전히 다른 존재와 맞닥트렸을 때, 마주한 비인간은 인간의 집중력을 최고치로 올릴 수 있는 상대다. 알듯 말듯한 말을 알아듣기 위해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주시하며 세계를 유추하고, 상상하고 확인하려고 실험한다. 이건 인간만이 사유하는 사고가 아니리라 확신하는 것은 그가 나의 행동을 알아채고 따라 하고, 내게 무슨 말인지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동물과 함께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모든 동물이 대화를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에게도 관계가 성립돼야 노력과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면 인간 외의 존재와 연결감을 갖지 않기란 쉽지 않다.
동물을 기르는 일에 부정적이지만*, 어떠한 연유에서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함께 사는 일은 권하고 싶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면, 어쩌면 삶이 더 복잡하고 시끄러워질 수도 있지만, 어느새 눈 돌리고 싶은 참상을 똑바로 보는 용기가 생기고, 모르는 사이 성큼 다가가 있을 것이다. 다양한 관계를 만드는 일은 결국은 작은 점 같은 존재를 확장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통하는 말을 나누는 관계이건, 어렵게 알아내야 하는 관계이건, 사이에 오해가 있건, 없건 상대를 헤아리려 노력하는 일이 주는 감동을 알게 되면, 그것이 곧 나를 비추는 거울임을 알게 되면, 바라보고 듣는 일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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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물을 기르는 일에 부정적인가? 라는 궁금증이 생기실터다. 이것은 다른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작가 소개
안아라: 남을 위한 먹을 것을 만들다 무엇을 먹는지, 먹을 것은 어디에서 오는지 관심을 두게 되었다. 잔칫상에서부터 한 그릇의 음식에 담긴 생사를 보고 “적절한 음식과 삶”에 대해 궁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