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Owe you.
(당신에게 빚을 졌습니다.)
삶을 살아갈 때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가치가 있다. 나는 당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잊지 않기.
무슨 빚을 지고 살고 있는 걸까. 부탁을 유달리 많이 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돈을 꾼 것도 아닌데.
간단하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지금 커피를 한잔 내려서 마시면서 글을 쓰고 있는데, 원두는 Columbia El Paraiso Lychee를 사용하여 핸드드립을 하였다. 커피리브레에 있는 원두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오면 아래와 같다.
카우카, 삐엔다모에 있는 엘 파라이소 농장에서 가지고 온 원두로, 더블 아나 에어로빅이라는 기법으로 미생물 발효를 컨트롤하여 폭발적인 향을 이끌어 낸 것으로 추측된다.
리치(Lychee)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말 그대로 열대과일 리치의 향이 나기 때문이며, 개인적으로는 리치 차(Tea)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일 향이 강렬하다. 블루밍(커피 원두에 최초로 물을 부어 원두를 불리는 과정) 할 때부터 열대과일 향이 폭발적으로 퍼져 나오며, 추출이 완료되었을 때 한 모금 마시면 마치 향수를 마시는 것처럼 엄청나게 진하고 강렬하다.
이 원두를 공짜로 얻은 게 아니고 제 값을 주고 샀지만, 이 원두를 마실 때마다 난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지불한 값은 약 만원 남짓이지만, 스페셜 커피의 특성상 누군가는 콜롬비아의 이 농장에 수차례 방문해서 원두를 확인하고 마셔봤을 것이다.
오랜 논의 끝에 생두를 수입하기로 결정했을 것이고 한국에 가져오기 위해 많은 통관절차를 거쳐야 했을 것이다. 국내에서 이 원두를 알리기 위해 수입처 측에서는 원두의 최적 로스팅 포인트를 찾고 커피업계 종사자들에게 이 원두를 설명했을 것이며 무료로도 참 많이 나눠졌을 것이다. 노력 끝에 입소문이 나며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홍보 없이는 고객에게 가닿기 어렵다.) 집 근처 커피가게 사장도 생두를 구입하였고 로스팅 포인트와 드립 포인트를 잡기 위해 수많은 원두를 소진해가며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카페에 들러 사장이 내려준 커피를 맛있게 먹으며 원두를 사 왔고, 집에서 이 향이 폭발하는 원두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약 10분 정도 카페까지 걸어가고 약 만원 남짓의 비용을 지불하고 원두를 들고 나온 수고만 했을 뿐이다.
내가 아무 곳이나 가서 만원을 낸다고 이토록 만족스러운 원두를 구입할 수 있을까? 맛이 없는 원두를 만원에 사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그저 나는 운이 좋게 국내 커피 수입처에서 원두를 수입하기로 '결정'했고, 집 근처 카페 사장도 원두를 들이기로 '결정'했고, 최적의 맛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친 '노력'을 했기에 이 원두를 우리 집에 들일 수 있었다.
만원 남짓은 제품의 가격일 뿐이다. 물론 나는 만원 남짓을 지불했을 뿐이지만 나 같은 수백 명의 사람이 지불 했기에 원두 수입사와 카페 사장들에게는 이윤이 돌아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할 노력의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특별한 생두를 찾는 것은 발로 뛰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콜롬비아까지 가는 게 이젠 쉬워졌다고 해도 정말 몸편히 맘편히 갈 수 있는 곳일까? 콜롬비아 농장주와도 인간적인 신뢰를 쌓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잘 팔 수 있다고 설득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향이 강한 생두의 로스팅 포인트를 잡는 것도 한두 번 한다고 되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몇십 킬로를 사서 감으로 한번 로스팅을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온도를 조금 올려서 짧게, 온도를 내려서 길게, 약 1도와 5초의 차이로 달라지는 여러 변수를 시도해봤을 것이다. 장사와 이윤만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짧은 시도로 리치 향만 나게 해서 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페 사장보다 드립을 내리는 기술이 떨어지는 나 조차도 이렇게 집에서 눈물 나도록 감동적인 한잔을 마실 수 있었던 건 '이윤을 생각하는 계산기' 너머 정말 좋은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는 '계산기에 포함되지 않은 수고'가 있었을 것이고, 이건 내가 지불하는 금액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난 그저 그런 맛의 원두를 마시고 있었겠지만, 여러 사람들의 특별한 노력과 결정이 있었기에 같은 금액을 지불하고도 가슴 설레는 원두를 마실 수 있다. 이건 분명히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부분이며, 한 모금 한 방울을 아까워하며 애타게 마시고 싶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는 선물을 받은 것이다.
간단하게 커피로 예를 들어 설명했지만, 우리 삶은 사실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베풀어지는 친절들, 허리 디스크를 얻어가면서 쓴 누군가의 인생 노하우가 담긴 책, 누군가가 발로 뛰며 얻은 노하우로 만든 물건, 혼자만 알고 있지 않고 시간과 품을 들여서 설명해주는 유투브. 작은 종이에 적어서 건네준 응원.
모두 '그렇게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마음을 쓰고 있다.
오늘도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지며 살아간다. 그렇게 받은 마음들로 살면서 나 역시 반드시 돌려주겠다고 결심한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내 마음은 어디까지 퍼져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