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머그잔에 진한 커피가 가득 담겨 찰랑거린다. 머그잔은 너무 하얗다 못해 어떤 경견한 마음이 들도록 하는데, 그 안에 담긴 커피는 아주 맑은 날 밤하늘의 색을 닮았다. 커피가 검정이라는 말은 옳지않다. 힐끗 볼 때 검정색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갈색도, 남색도, 검정색도 아닌 중간의 색이다. 가득 담긴 커피와 머그가 만나는 경계는 검정이 힘을 풀고 머그에 기대 쉬고 있다. 검정으로 힘껏 멋을 부렸지만 힘에 부쳐 원래 자신이 갈색이었음을 더이상 숨길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 갈색은 풀린 갈색이다. 희미하고 부드러운 갈색이기에 커피가 딱딱한 고체가 아닌 유하고 부드러운 액체라는 사실을 시각적으로도 보여준다. 아래가 오목한 머그의 중앙은 가장 깊은 탓에 짙은 갈색과 검정과 남색의 중간을 띄고있다.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이 그러한 것처럼.
한 잔의 커피 위에 놓인 노란 조명에 흰 머그도 어두운 커피도 광이 난다. 마실 것과 마실 것을 담고 있는 것들이 모두 반짝이기에, 잘 내려지고 잘 담겨진 한 잔의 커피는 마시는 사람에게 대접받는 기분이 들게한다.
흰 머그 받침에는 은색의 수저가 다소곳이 놓여있다. 설탕도 우유도 타먹지 않는 내 앞에서 수저는 유용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처량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이 회색 수저는 흰 머그와 검은 커피의 중간에 어떤 타협점을 찾으려는 듯 놓여있다. 극명한 대비는 너무 강하다는 듯, 중간자를 자처하며 내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포인트가 되려고 나서지 않은 은수저덕에 머그와 커피와 은수저는 그들 자체로 흑백사진 속에 놓여있을 수 있다. 무채색은 평화롭다. 저들은 여기에 같이 놓이기까지 사연이 많아보이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는 내가 사연이 많아보이게 하기도 한다.
이젠 커피를 한 입 마셔본다. 완강하면서도 은근한 색이 머그와 입술이 만날 때 입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입 밖에 놓여있는 커피는 강한 색으로 시선을 뺏지만, 커피가 입으로 들어온 순간 색은 맛과 향으로 승화된다. 맛보다 향이 먼저다. 맛을 느끼기도 전에 강렬한 향은 코로 훅 올라간다. 코에서 향이 판칠 때 입에서는 온도를 느낀다. 아직 삼키기 전이다. 그 때 커피는 자신들이 흙에서 온 놈이라는 출신을 밝힌다. 흙의 향기, 흙의 온도를 입속에 있는 커피에게 가장 먼저 느낀다.
삼킨다. 목구멍을 통하여 내 안 깊은 곳으로 커피를 삼킨다. 삼키는 행위는 소유욕의 발로이다.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곁에 두는 것이 아니고, 손에 쥐는 것이 아니다. 삼키는 것이다. 삼키는 것은 타인과 나눠질 수 없는 행위이다. 내 몸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본능에 의해 일어나는 은밀한 행동이다. 삼키는 것이 본능이라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입안에 넣고 삼키지 않기위해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지, 입에 잔뜩 고이는 침이 음식을 뱉는 것과 삼키는 것 중에 선택하기를 얼마나 독촉하는지 경험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렇게 내가 넣었지만 내가 꺼낼 수 없는 내 공간으로 커피를 삼킨다. 향이 맘에 들수록 더 강한 소유욕을 느낀다.
커피는 혀에서 느껴지는 맛과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맛이 다르다. 혀에서 커피는 즉각적이고 확 퍼지는 확장의 맛을 선사한다면, 목구멍에서는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과거의 맛을 남겨놓는다. 목구멍에 남은 맛과 향은 다시 입안으로 올라올 때만 느껴질 수 있다. 커피는 내려가고 맛은 입안으로 밀어 올려진다. 목구멍에서 중력을 거스르며 올라온 맛은 이미 지나간 커피의 것이기에 아련하고 숙연하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볼 때 느껴지는 아련함과, 이미 지나간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숙연함이다. 이때의 커피는 이별의 맛이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고 남아있는 추억만 곱씹을 수 있기에, 나는 괜히 비어있는 목구멍을 꿀렁거리며 남아있는 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본다. 이별의 맛 마저 다 지나가면 입 안에는 미련의 맛이 남는다. 다 마셨다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