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최근에야 겨우 보았다. 개봉할 당시부터 난해하다는 평과 지루하다는 평, 좋은 영화였다는 평이 오간 이 영화를 필자는 뒤늦게 감상평을 남길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오고 가는 평들을 조금 찾아보았다. 난해하다는 평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불쾌하다는 평이었다. 소위 늙은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훈수를 두는 듯하다는 식의 평, 일본의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는 평들이 주로 불쾌하다는 감상을 남기고 있었다.
예술은 개인의 다양한 감상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투영해 그 예술을 호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까. 자신이 느끼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전범국 정당화'라는 있지도 않은 내용으로 영화에 투영시키는 이러한 평들은 잘못됐다. 예술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평가는 그 예술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어디까지가 그 예술이나 영화에 대한 평이 되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가치관과 세계를 갖고 있어서 각자의 감상평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예술 평가의 기준이란 존재하는 걸까? 심히 난감한 질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 경계선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져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부당한 평들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상대주의적인 논지에 빠져 좋은 영화를 놓치고 지금까지의 감상들을 나눈 행위들이 무의미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것이 진리고 내가 느낀 감상은 무조건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독단론으로 빠지기 쉽다. 한편으로는 모두가 느끼는 게, 제각각이 느끼는 것들이 모두 진리라면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든다면 회의론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 경계선에 대해 철저하게 논하는 것만이 두 논증으로 흘러가지 않기 위한 방편이다.
예술에 대한 평들에 대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는 데이비드 흄의 포도주 비유가 적합할 것이다. 포도주를 마신 두 사람이 서로의 감상을 나눈다. 이 포도주는 약간의 철분맛(?)이 난다.... 아니다 뭔가 가죽향이 나는 것 같다... 서로의 취향이나 미각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므로 서로의 의견은 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마시던 포도주통을 확인해 보자 그 포도주통에는 가죽끈이 달린 열쇠가 나온다. 이 일화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포도주에 대한 평들의 '내용'은 각각 다를 수 있다. 미각이 민감한 사람들은 그 포도주 안에 있는 다채로운 향들을 각각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향들이나 맛은 포도주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어야 할 것이다. 갑자기 그 포도주에서 맥주맛이 난다든가(같은 술 종류니 그럴 수 있다는 반론은 넣어두고), 매콤한 맛이 난다든가 하는 식으로 우겨선 곤란하다. 자신의 미뢰가 다른 이들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주장 또한 이 상황에선 적합하진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대상에 대한 평을 나눌 수도 없을 것이다. 왜 나눌 수 없는가? 그것은 우리의 감관이, 칸트적으로 말하면 형식의 틀이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모두가 갖고 있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소위 '차이'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나누고 공통적인 것에 공감하며 즐거워한다. 제각기 다른 개성들을 존중하되 공유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면 건전한 사회이지 않을까. 단순히 개성화라는 말로 우리의 공동성이 사라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평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난해하다는 평은 우리가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우리는 일정한 감정의 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선 그렇게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는 일본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옹호했는가? 이에 대해선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난해하다는 평의 경우를 조금만 더 짚어보자. 이 영화는 직관적으로 주제의식을 명료하게 밝히진 않는다. 물론 모든 예술이 명료해야 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주제의식을 감춰둘 필요는 없다. 주제의식을 어떻게 드러내고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는 오로지 감상자의 몫일 것이다. 영화가 만약 그것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했다면 그 영화는 주제의식의 부분에서 실패한 것이겠다.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가? 이런 질문이 영화를 볼 때 느껴진다면 영화가 좀 더 우리를 고심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실패했는지를 감상자는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주제로 들어가는 길이 정교하게 짜여 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누구나 들어가긴 쉽지 않은 구조다. 온갖 비유와 상징이 범람하기보다는 애초부터 신비롭게 들어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감독의 이러한 배치는 이야기의 주제를 단순히 현학적으로 둔갑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야기의 주제가 이런 식으로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는 이런 구조가 아니고서야 전달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난해하다고 평하는 이유는, 그 영화가 난해한 이유는 뒤집어 말하자면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창작자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를 분별하는 기준과 안목을 갖추기엔 쉽지 않다. 단순히 의미 없는 이미지의 나열들을 어지럽게 배치해 놓고선 무언가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떠들어대는 위선자들과는 다른 것이다. 위선자들이 판을 치는 마당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기존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한 채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의식을 던졌다. 혹자는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미 그 상징들(마히토는 감독 자신이고 왜가리는 감독의 작품이고....)을 밝혔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줄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감독의 해석일 뿐이다. 작품은 감독 자신만의 것이 될 수 없다. 물론 작품을 내지 않았고 감독만 그 작품을 본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11살 소년 마히토는 군수공장주의 아들이다. 어머니를 화재 사고로 잃고 그는 새로운 가족(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과 함께 새로운 저택으로 가서 살게 된다. 말수가 적은 그는 어딘가 남모를 상처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주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적극적이지 못하다. 아버지가 군수공장의 사장이기 때문에 자신이 유복하게 사는 이유가 다른 이들의 시체 위이기 때문이라는 실감은 그의 죄악감을 한층 더 두텁게 만든다.
그러한 삶의 와중에 그는 말을 하는 왜가리를 보게 된다. 사람의 말을 하는 왜가리는 마히토를 다른 세계, 그러니까 이세계로 데려가려 한다. ...
언뜻 보면 단순한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그 신비로운 이미지 때문에 감독의 팬들은 감독이 배치한 하나하나의 상징들을 어떻게든 파헤치려고 한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일반적인 관객들은 한숨을 쉰다. 뭐가 그렇게 먹을 게 많다는 거야? 직관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 소위 오타쿠라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런 난감한 미로에 빠지길 좋아한다. 설정들을 분해하고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정을 파고드는 행위가 독단이 되는 순간, 작품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작품은 오명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팬이든 아니든 두 부류 다 설정을 분석한 탓인지 오독의 경우와 과장의 경우가 범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세세한 분석을 여기서 나열하면서 오독의 경우를 반론하는 것은 여기서는 불필요한 일이다. 필자는 되도록 단순하게 이 영화에서 나타난 전쟁책임의 문제를 되짚어보려고 한다.
다른 곳에서 이 영화를 평하기론 미야자키 하야오 개인의 그리움과 자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본의 위대했던 과거 시절의 향수를 연상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독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개인적 이야기가 있든 없든 간에 영화에서 드러난 중심적인 사고는 결국 과거에 대한 죄의 무게와 앞으로의 자세에 관한 이야기다. 마히토는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나서는 스스로 돌멩이로 자신의 머리를 찍는다. 그리고 그 피를 가족들에게 보여준다. 왜 그는 스스로 상처를 입히고 가족들에게 보여줬는가? 그는 원체 말수가 적은 아이라 가족들은 그의 행동이나 외연만 보고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제삼자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관객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마히토는 관객들에게조차 자신의 속마음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내면의 상처를 굳이 외연으로 보여주며 자신의 상처와 함께 자신이 어떤 배경의 사내인지를 실감하고 있다.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버린 화재의 원인. 전쟁. 그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제작하는 나의 아버지... 자신이 다른 아이들에게 반감을 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 히미는 마히토가 같이 자신의 시간대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거절한다. 그녀는 분명 죽게 되겠지만 그녀는 그 운명대로 살려고 한다. 왜 그런 결정이냐는 마히토의 질문에 어머니는 대답한다. 너를 낳는 건 멋진 일이잖아! 히미의 대답은 어딘가 묘한 면이 있다. 일본의 여신 신화에 대한 이미지는 일단 잠시 차치하더라도 히미는 자신의 운명을 결국엔 받아들이고 그 후에 살아남은 운명에 대해 사랑을 보낸다. 군수회사의 아들이라도, 전범국이라도 결국엔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비단 죄책감만으로 점철된 삶도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를 잊고 그저 속 편하게 살라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히토는 히미를 구함으로써 과거를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 죄악감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도 않는 것이다. 결국엔 남아 있는 자들의 결단만이 삶의 방향으로 남겨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