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장녀의 오래된 이야기
칠십 년대 공교육의 주제는 반공이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과 더불어 잊지 말자 6.25, 간첩신고는 113을 들으며 자랐다. 말하자면 나는 유신시대 어린이였다. 6∙25 기념일이 다가오면 포스터를 그리고 웅변대회가 열리고 6∙25 백일장이 있었다. 아마 이승복 어린이는 이 모든 대회에서 단골 주제였을 것이다. 어린 내가 들어도 고개가 갸웃해지는 웅변이 생각난다: ‘어린이 여러분! 우리도 이승복을 본받아 입이 찢어지더라도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칠 수 있는 용기 있는 어린이가 되자고 이 어린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그 어린 연사는 두 손끝으로 하늘을 찌를 듯 뻗으며 상체를 한껏 뒤로 젖힌 채 웅변을 마무리했다. 우리 모두는 자동인형처럼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박수를 쳤지만 누군가 멈추었어야 할 일이었다. ‘그래, 공산당을 때려잡더라도 그건 어른의 일이야. 너희들은 너희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돼.’ 우리에겐 불행히도 이렇게 말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공산당이라면, 아무 데나 출몰해 죄 없는 아이를 죽이는 공산당이라면, 아이들에게 간첩을 만나면 쥐 죽은 듯이 있다가 틈을 봐서 신고해야 해. 절대 대들어선 안돼. 가르쳐야 하지 않았을까? 과연 열 살짜리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비극적 죽음을 당한 일을 영웅화했어야만 했을까? 누구를 위해서? 그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한 아이의 비극적 죽음을 정치에 이용하고, 몇십 년을 자라나는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건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어렸을 때 빨갱이가 진짜 뿔 달린 빨간 괴물인 줄 알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정도면 트라우마라 할 만하다. 이 범국민적 트라우마는 유용한 보수정권의 정치자본으로 오랫동안 마르지 않는 화수분의 역할을 충실히 치르고 있다. 혹시라도 상처가 아물어버릴까 봐 이미 아픈 곳을 계속 할퀴는 공작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토록 비이성적인 국민계도에 많은 사람들이 반항하지 않고 살아낸 이유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1950년에 일어난 전쟁이다. 우리는 전쟁의 공포에 대해 들었지만 부모세대는 그 공포를 겪었다. 어느 맑고 평화로운 일요일이 3년간 동족상잔을 목격하게 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심리적, 육체적, 경제적 재건의 고통을 겪을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공포였을지 잠작도되지 않는다.
전쟁이 났을 때 엄마는 열한 살이었다. 그 근교에서 드레스와 양복을 입고 결혼한 최초의 부부였고, 테니스를 즐기고 사친회에 치맛바람 살짝 일으켰을 법한, 엘리트 부부였던 외조부모는 위로 두 딸을 서울에 유학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이 서울에서 살기 시작하자 서울에 집을 지으려고 자재도 주문해서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고, 엄마 말로는 서울 유학은 외국 유학으로 이어질 터였다. 전쟁이 나고 학교가 쉬게 되자 엄마와 큰 이모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려고 김밥을 싸가지고 사직공원으로 나갔다고 한다. 큰 이모도 고작 열일곱 때였으니 전장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두 소녀의 운명이 마음 아프다. 엄마는 그날 일을 ‘사직동’이라는 시로 썼는데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사직공원 벤치에 앉아 김밥을 먹으며 너무도 보고 싶었던 엄마, 엄마.
그때의 엄마처럼 나이가 들고 나의 어린것을 낳아 기르던 사직동.’
천신만고 끝에 두 자매가 원주 고향에 돌아왔지만, 든든했던 아버지는 납북되고, 남편의 구명운동을 하던 어머니는 원주가 폭격 맞은 첫날 돌아가셨다. 엄마에겐 젖먹이 막냇동생이 있었는데, 전쟁통에 위생도 신경 쓸 수 없고, 제대로 된 이유식을 못 먹어 배탈이 나 죽었다. 아기가 죽어도 누군가는 밥을 해야 했다, 열입곱살에서 다섯 살까지의 어린 남매들은 살아야 했으니까. 그게 엄마였다. 맏이로서의 부담이 컸던지 큰 이모는 살림을 나 몰라라 했다고 한다. 엄마는 한 마디로 어린 시절을 도둑맞았다. 내가 스무 살 훨씬 넘어서까지 지속된 어린 시절을 즐겼다면, 엄마는 열한 살에 생계를 걱정해야 했을 것이다. 한반도가 다 겪은 고통이며 더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6∙25의 비극은 엄마의 일생을 사로잡았다. 박완서가 6∙25 얘기를 쓰고 또 쓰면서 치유의 한 방편으로 삼은 것처럼 엄마도 똑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하면서 그 고통이 좀 무디어지고, 자유로워지길 원했던 것 같다.
엄마의 전쟁은 대를 이은 서사가 되었다. 우리 삼 남매도 처음 몇 번 들었을 때는 엄마의 비극에 공감했다. 우리의 안녕과 풍요가 미안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그 이야기는 우리가 게으를 때, 음식 투정할 때, 공부 안 할 때, 불평불만이 터질 때, 불평 방지용 교육자료로 더 많이 쓰였던지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비극으로 들리지 않았다. 정작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엄마는 그 비극을 그대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일찍이 자유로워져서, 6∙25는 비극이라는 이름의 잔소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이 나이가 되어 생각해 보니, 40대 초반에 죽은 외할머니나, 납북되어 한동안 북한에 살았던 외할아버지는 홀로 남겨졌을 육 남매가 눈에 밟혀 어찌 눈을 감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있던 막내는 죽은 줄도 몰랐을 테니 가슴이 더욱 먹먹해진다. 올망졸망 어린 오 남매가 – 막내가 죽었으므로 – 살아온 세월도 기가 막히다. 엄마가 아픈 동생을 살려보려고 애쓰던 일이나, 파를 묶어 장에 내다 판 얘기를 해줄 때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노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 자아낸 비극에 물들어 있을 것이다. 예전엔 몰랐지만, 현재 많은 연구논문들이 어린 시절에 겪은 고통과 절망들이 나중에 어떻게 외상 후 스트레스성 증후로 나타나는지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 알고 보면 이 세대는 모두가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세대 전체가 공포의 포로가 되어 정치가 그들을 이용하도록 잠정적 수락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그 정도의 이용은 견뎌낼 만했을 것이다. 베이비 부머 이후의 세대가 개인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일탈적인 X세대인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X 세대 같은 카운터 펀치가 있었어야만 전쟁의 트라우마와 결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주 연방정부에서 가족과 아동정책에 연관된 연구를 꽤 오래 해왔다. 가끔 관련 논문을 읽으면서 엄마의 자녀양육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적지 않은 문제점이 분명히 있었고, 그 속에서 나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다. 아직도 내적으로 화해가 안 되는 갈등이 있지만 객관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서 부모를 오래 경험해 보지 못했고, 아주 어릴 적부터 생존이 최대 과제였으며, 그 와중에 자수성가해서 자기 효능감이 한없이 높은 엄마다. 나의 성향도 있겠으나, 양육과정에서 겪었던 애착 문제라던지 불안이 나의 성장기를 괴롭히고 내가 아이들을 기르는 과정에도 개입했을 것이다. 당연히 나의 아이들도 나의 양육 때문에 고통받거나 왜곡된 점이 있을 것이다. 전쟁을 겪은 후 십수 년이 지나서 태어났지만, 그리고 일찍이 외국 생활을 시작했지만, 전쟁의 그늘은 내게도 짙다. 늘 먼 곳에서 외로울 부모가 마음 쓰인다. 어쩌다 세 아이를 다 외국으로 보내 놓고 노년을 외롭게 지내게 되었는지 한숨이 난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부모를 떠나 정서적으로 독립을 한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직도 가끔 서럽다. 혼자 남겨져 바라보던 저녁 하늘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엄마를 이해하는 건 이해하는 거고 쓸쓸한 건 쓸쓸한 거다. 나도 엄마도 혼자 견뎌야 할 자기 몫의 서러움과 쓸쓸함이 있다는 것, 또 다른 가슴 먹먹함이다.
뱀발 – 얼마 전, 엄마는 자신이 겪은 전쟁과 전후의 경험을 수기로 써서 상을 받았다. 외국에 사는 동생들은 참석할 사정이 안되는지라 남편과 내가 한국으로 날아가 축하해 주고, 시상식에 와주신 하객들을 대접했다. 그 수기가 책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출판사 쪽에서 수기와 함께 가족사진을 실어야 하니 사진을 보내 달라한 모양이다. 엄마는 자녀 손주 등 가족이 제일 많이 나온 사진을 출판사에 보냈다고 했다. 나중에 책을 보니 나와 남편만 없는 사진이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한숨이 나왔다, 우리 엄마가 그렇지 뭐.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