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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아란 Jun 09. 2022

지나가 버릴 것에 대해


시련 앞에서 우리는 읊조린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모처럼의 평화 앞에서도 우리는 자조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지나가버리고 말 테지. 희로애락은 인과와 순서 없이 뜻밖으로 왔다가 속절없이 사라진다. 나를 평생토록 옭아매지 못하는 것은 비극만이 아니다. 완전한 안식 또한 공고히 뿌리내리는 법 없다. 그러므로 평화롭다는 말은 동사다. 몹시도 치열하고 처절한 움직임.


선이라는 것은, 악이라는 것은 그저 깊고 울창한 숲속의 굴참나무와 단풍나무로 서있을 따름일 것이다. 여타의 나무 풀 꽃 벌레와 이끼도 거기에 있고, 흙 물 바람 돌과 햇살도 한데 있다. 무질서하게 산발한 카오스 형상을 하였으나, 내실은 맞춤하게 어우러져 제자리에 선 코스모스의 숲. 그 안에서 단지 두 그루의 나무를 골라내 짝 지은 것은 언어를 만들어낸 자들의 유희이리라.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유리하고 불리함 따위로 대립하게 만든 것은 정치를 만들어낸 자들의 장치이리라. 고독함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의 오락거리, 그리움을 그리워하고픈 자들이 끌어안고 잠드는 담요 같은 것이리라.


담요를 움켜쥐고 엄지손가락을 빨면서 나는 납작 웅크린다. 나쁜 것이 나를 못 보고 지나가길 바라며, 또는 괜히 좋은 것이 건드려져 일렁이지 않도록 나는 숨조차 쉬지 않는다. 풍화하지 않겠다는 듯, 산폐할 수 없다는 듯 마치 이 숲에 존재하지 않는 듯 굴어보지만 모든 노력은 언제나 허사다. 작게 웅크린 나의 부피가, 나의 비중이, 무게도 향도 없는 나의 불안까지 숲에 속해 있으므로, 숲은 그것까지 다 안고 시간 속을 유영한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리는 시간 속으로.


그 시간마저도 느리게 흐르거나 빨리 달리며 나약한 인간을 조롱한다. 간절히 붙잡고 싶은 마음 들키지 않으려 애써도, 그 애씀마저 화력을 높이는 쏘시개가 되어 어떤 시간은 꽁지에 불 붙은 족제비처럼 달아나 버린다. 어서 가버렸으면 하는 시간은 꼭 그 반대다. 무례한 손님처럼, 그 시간은 내 집 찬장까지 턴다. 마음대로 냉장고를 뒤적여 배를 채우고, 안방을 차지해 코 골며 잔다. 밤낮으로 기대 앉을 의자 한 켠을 얻지 못하고 그 무뢰배에게 시달려 피가 마른다. 닷새, 엿새, 새는 것도 지쳐서 희망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을 때쯤 시들한 표정으로 그가 출구를 찾는다. 이죽거리며 천천히 다리를 끌고 나선다.


모든 소동이 끝나고서도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창밖 저 멀리 소음은 소음대로, 고요는 고요대로 두렵다. 누군가는 그래서 그 무뢰한이 내어주는 침대 옆자리로 기어가는 것이리라. 그의 밥상을 차리고 그에게 몸을 내주는 것이리라. 적어도 불시에 겁탈 당할까 두렵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막연한 기대로 에너지 낭비하지 않아도 되니까 누군가는 어쩔 수 없는 것과의 동침을 택하곤 한다. 나 역시 닷새, 엿새가 아니라 쉰 날, 예순 날이 되었다면 그랬을지 모른다. 내 나이가 예순이거나, 내 근력이 지금만 같지 않다면 나도 어쩔지 모르겠다. 고분고분 그의 발을 닦는 일에서 차라리 안도감을 느낄지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분통할 수 있는 체력이 있기에, 때때로 거추장스러운 필살의 상상력과 끊임없이 운명을 긍정하는 한심한 낭만에서도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몇 끼를 굶고도 악착같이 글을 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수굿해진 틈을 타 자음과 모음을 되는대로 엮어 가시덤불 옷을 지어 입는다. 이 옷을 걸치고 있는 한 그도 나를 발가벗기지 못하고, 나도 내 손으로 벗을 수가 없다. 이제는 이 글 때문에라도 나는 포기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계단을 오른다. 몇 층이나 집을 지나쳐 버렸다. 멈추지 않는다. 가다 보면 꼭대기가 나올 것이다. 멈추는 일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 이 통증도, 가쁜 숨도, 도무지 식을 것 같지 않은 열도 모든 것은 지나가버릴 것이므로. 지금은 오르는 일에 충실한다. 한 칸 한 칸 내 앞에 놓인 층계를 밟아 없애는 데에만 몰두한다.


빠르건 더디건 끝은 나타날 것이다. 그 끝 다음에 또 다음 길이 이어져 있을 거고, 굴참나무 단풍나무가 아무런 악의도 개연성도 없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줄도 모른 채 그저 단단히, 그저 싱그럽게. 묵묵히 재바르게 내 갈길 가다 보면 방금 스친 나무의 이름 같은 건 알지도 못한 채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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